[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 된장국을 끓일 때

2024.02.26 06:00:00 13면

 

늘 그렇더라. 함께 섞일 것들 말이다. 사람도 그렇고 먹을 것도 그렇지. 된장국이 된장국인 까닭은 주인 되는 것이 된장이기 때문이다. 된장국은 된장의 맛을 가장 오묘하게 살려낼 수 있을 때, 된장국으로서 존재를 드러낼 수 있다. 언제였을까. 글 보따리를 들쳐 매고 겨울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간 적이 있다. 그해 겨울은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렸다. 산이 깊어서였을까. 산을 덮은 눈 때문이었을까. 내 발로 걸어 들어간 어느 산기슭 외딴집에서, 나의 고립은 속절없이 홀로 깊었다. 깊은 고립에서 벗어나려 서성이는 날이면 어김없이 눈이 내렸다. 어제 내린 눈을 오늘 내린 눈이 덮었고, 간밤에 깊었던 고립 속으로 새벽에 깊어진 고립이 다시 스몄다. 그런 날이면, 눈 덮인 산기슭 외딴집에서 나는 된장국을 끓였다.

 

끓인다고 녹아 없어질 겨울은 아니었다. 구들장까지 파고든 겨울은 궁둥이를 오므라들게 하고 발가락 마디마디를 비틀어놓았다. 군불을 지펴도 까딱없을 겨울이 그깟 된장국 한 냄비로 녹아 없어질리 없었다. 없는 줄 빤히 알면서도 푸성귀를 썰고 된장을 풀어 넣는 까닭은 그것 말곤 어찌할 게 없어서였다. 누구 하나 오라고 꼬드긴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 걸어 들어간 겨울 한복판에서, 나는 글 보따리를 풀지도 못하고 눈에 파묻혀 버둥거렸다. 사발 가득 꾹꾹 눌러 밥을 담아도 입맛이 돌아오지 않았다. 애써 끓인 된장국도 헛헛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된장을 푼 물 위에서, 감자와 양파와 대파와 버섯과 호박이 제각각 따로 동동거렸다. 펄펄 끓어 넘친 된장국 속에서도 그것들은 각자의 겨울 속에 고립된 것 같았다.

 

밥상을 물리고 나면 걸레질을 했다. 젖은 걸레로 방바닥을 닦고 걸레가 남긴 물기를 마른 걸레로 다시 훔쳤다. 닦고 훔친다고 씻겨나갈 겨울은 물론 아니었다. 그걸 빤히 알면서도 닦고 또 닦은 까닭은 겨울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었다. 내 바깥의 겨울은 어김없이 봄에 밀려날 것이지만 내 안의 겨울은 봄이 찾아와도 까딱없을 겨울이었다. 그해 겨울, 내가 산기슭 외딴집에서 풀어내려고 했던 것은 글 보따리였을까. 아니면 내 안에 시퍼렇게 살아있는 엄동설한(嚴冬雪寒)이었을까. 다시 생각해도 아찔한 겨울이었다. 펄펄 끓이고 싹싹 닦는다고 녹여낼 겨울이 어디 있겠는가. 계절의 겨울이 그러한데 사람 안의 겨울이야 오죽할까. 얼든 끓든 두려워 할 일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인 것은 섞이고 뒤엉키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섞임을 저어하지 말자. 세상이든 사회든 도시든 섞이지 않고 이뤄지는 것이 있던가. 사람이 섞이고, 생각이 섞이고, 말과 글이 섞이는 곳이 우리가 사는 곳이다. 추억이 섞여 친구가 되고, 사랑이 섞여 부부가 되고, 운명이 섞여 가족이 되는 곳이다. 탐욕과 계산이 싫다고 섞임을 거부할 때, 연민과 배려 또한 멀어짐을 당신도 잘 알지 않는가. 수없이 덧칠한 물감처럼, 한없이 고쳐 쓴 문장처럼, 우리 그렇게 섞이며 이 겨울을 살아내자. 부둥켜안고 가름과 밀어냄으로부터 오늘을 지켜내자. 겨울을 딛고 일어서는 봄이 되자. 하지만 지금은 한없이 깜깜한 겨울, 당신은 어느 시간에 섞여 고립을 견디고 있는가. 당신이 끓이려는 된장국 속 반려(伴侶)의 정체는 무언가. 섞이고 또 섞여서 이 겨울을 녹여낼 뜨끈한 국물의 참 얼굴은 무엇인가.

 

봄은 벌써부터, 겨울에 갇힌 당신 속에 있다.

고향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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