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적인 일상] 자기소개서

2024.03.21 06:00:00 13면

 

남들이 모두 일하는 평일 오후, A는 또다시 노트북을 펼친다. 화면을 노려본다. 눈앞에 놓인 것을 희대의 난제처럼 느끼고 있다. 하얀 배경에 커서만이 깜빡거린다. 쉬이 글이 써지지 않는다. 자기소개서. 자신을 소개하는 글. 700자 내지 1000자를 기준으로 본인을 소개하는 것이다. 막막하다.

 

물론 파훼법은 있다. 목적을 생각하는 것이다. 날 먹여주고 재워줄 대감집에 머슴으로 들어가기 위해 쓰는 글인지, 남들이 인정하는 학당에 어울리는 차세대 인재임을 증명하는 글인지, 준비된 전문가로서 자신의 능력을 어필하는 글인지 등. 나의 특정적인 면을 궁금해하는 상대에게 맞춰 나를 드러내면 된다.

 

하지만 목적을 안다고 해도 이내 곧 벽에 부딪힌다. 마음의 벽이다. 이게 정말 ‘나’가 맞나? 하는 의심의 벽이거나 목적을 너무나 잘 이해한 탓에 과도하게 멋있어진 글 속의 내가 어색하고 부끄러워지는 양심의 벽이다.

 

결국 한차례 글을 지우고, 다시 쓴다. 있는 그대로. 어쩐지 아까보다 글이 술술 써진다. 이번의 자기소개는 여러모로 적절해 보인다. 그렇게 글을 완성하고 다시 읽어보면 좌절할 수밖에 없다. 글 속의 인간이 허접하고 쓸모없어서.

 

갑자기 화가 난다. 이 방식은 너무 잘못된 것처럼 느껴진다. 목적 지향적인 짧은 글로는 온전한 나를 소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이 그러하듯, 나에겐 아주 다양한, 귀한 모습이 있는데 이 자기소개서라는 이름의 퀴즈는 나의 작은 일부만을 답으로 본다. 이 글 때문에 붙어도, 떨어져도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다.

 

결국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온전한 나를 써 내려가 본다. 저의 꿈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정하고, 건강한 사고방식을 갈고 닦아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싶은 사람입니다. 저는 살아온 시간의 대부분을 제가 속한 크고 작은 공동체 내에서 소임을 다하고 둘러 살필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자기소개서를 쓰는 건 어렵습니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일단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당신께서는 그만한 시간이 없으시겠지요. 그래서 전 이를 악물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 이 일이 꼭 필요하니까요. 저만큼 이 일을 원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과 비교해 굳이 저를 뽑아야 하는 이유가 있냐 물으신다면 저는 없다고 말할 겁니다.

 

가끔은 노력하지 않고 행운을 거머쥐고 싶습니다. 예컨대 마음 내키는 대로 쓴 이 자기소개서로 1차 서류 전형을 통과하는 일 따위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꽤 괜찮은 사람입니다. 뽑으시면 후회 안 하실 만큼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열심히 하는 것보다 잘하는 것이 더 중요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잘하게 될지는 보장할 수 없지만 열심히 하는 건 보장하겠습니다.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 행복과 건강, 재물운이 넘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이 자기소개를 가장한 고백은 결국 쓰이는 일이 없을 것이다. 다시금 표면적인, 자기 홍보에 중점을 둔, 실제와는 아주 조금만 닮아 있는 그럴듯한 거짓말을 쓰게 될 것이다.

문병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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