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행복한 오후의 시간

2025.05.12 06:00:00 13면

 

호숫가 정자에 앉아 있는데 호수를 건너온 아침햇살이 다가와 나를 꼭 껴안는다. ‘이게 자연의 품이겠지! 아니 생전의 어머니 품인가, 떠나간 아내의 체온인가?’ 5월의 아침햇살과 오후의 햇볕의 질감을 생각하게 된다. 참으로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자연의 품에서 아침햇살의 부드러운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며 정자에서 일어나 걸었다.

 

호수를 뒤로 하고 한동안 걸으면 복숭아 과수원으로 이름난 ‘대지’ 마을이다. 그곳 풋마늘의 생명력에도 눈 주고, 마을회관 옆집 꽃밭에서 꽃들에게 눈을 주고 있었다. 그때 꽃집에서 나온 아주머니는 떡국이 든 큼직한 통을 들고 가더니 골목 입구 첫 집 낮은 담의 창문을 밀치고 할머니에게 음식 통을 건네고 미소를 지으며 돌아서 간다. 그래 저 모습이야! 사람 사는 맛이란 담장 위로 음식을 주고받는 정으로 소중한 이웃이 되고 고을 인심이 넉넉해지는 것이지- 생각은 고향에서 살던 우리 집과 이웃 사람들의 얼굴과 인정으로 가슴이 훈훈해졌다.

 

아파트로 돌아오는 길에서의 생각이었다. ‘인생은 부싯돌의 불빛처럼 짧다.’고 했다. 그렇듯 짧은 인생이 왜인지 지루하게 느껴진다. 나는 지금 오후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도 외로움과 다르고 쓸쓸함과도 다른 ‘홀로움’ 속에서_ ‘그래 나는 남다른 매력도 능력도 없다. 밥 먹고 살려면 최소한 남들이 하는 것만큼은 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들려오는 소리 없는 언어가 가슴속에서 외쳤다. ‘몸 바쳐할 일이 있었고, 할 만큼 했어!’ 순간 움츠러든 가슴이 펴지고 손가락이 말아지면서 주먹이 쥐어졌다.

 

노년기의 삶은 인품 완성의 길이다. 괴테는 일생 동안 행복했던 시간이 17시간이라고 했다. 외로운 울분을 혼자 다스리고 그런 환경에서 생존을 지키고자 최선책으로 택할 수밖에 없는 길, 그것이 문학이요. 한마디로 운명이었다.

 

사람은 지나간 과거를 고칠 수 없다. 오직 앞으로 걸을 뿐이지. 황석영은 80 넘은 나이에도 매일 대여섯 시간씩 글을 쓴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글을 어떻게 쓰느냐?’라는 질문을 하면, 그럴 때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고 했다고 한다. 밭농사나 다른 일들과 똑같다. 는 것이다. 그저 꾸준히 열심히 쓴다는 거다, 그는 밤 10시쯤 책상 앞에 앉아 새벽까지 쓴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는 ‘노장 투혼’ ‘만년 문학’이라는 말도 어울리지 않게 하고 싶은 게 많은 ‘청년’이라고 누군가는 평했다.

 

유성룡이 기록한 퇴계의 연보에 따르면 퇴계는 관직에 있는 동안 정치의 잘잘못을 거리낌 없이 말했다. 하지만 관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달랐다. 그의 제자들도 퇴계를 닮아 모든 관직을 사양하고 정치 얘기는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한다. 

 

율곡 이이도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말했다. ‘친구와 함께 있을 때는 세속의 더러운 얘기, 정치의 시비, 등 타인의 잘못을 입에 담지 마라’고 했다. 후계자를 자칭한 송시열도 마찬가지였다. 농부가 모이면 농사 얘기를 해야 한다. 함부로 정치의 잘잘못을 따지고 남의 장단점을 말한다면 큰 잘못이다. 고 정치 얘기를 입에 담지 않는 것이 정치의 매너라고 강조한 것이다.

 

정치의 과잉시대, 양당시대의 양극화 사회를 보면서 이 시대의 처세술과 에티켓을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길이 아닌 것에는 조금은 무심하고 외면해도 되는 것을 괜히 흥분하여 혈압에 영향 끼칠 것 없다는 것도 나이 값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 말하기 좋다고 남의 말 하고 난 뒤의 입맛은 개운치 못하다.

 

생명에 대한 깨달음과 예의가 떠오른다. 기린은 하루에 3시간밖에 못 잔다고 한다. 개미는 아예 잠을 안 잔다고 한다. 하마는 오줌을 누워 지린내로 구애를 하는데 내년에는 제발 잘 생긴 미모로 짝짖길 희망하고, 타조는 년 중 6개월 이상은 혼자 생활한다고 한다.

 

자고 싶으면 자고 먹고 싶으면 먹을 수 있는 생명의 자유! 방안퉁수 같이 있다가도 바람 냄새가 그리우면 공원길을 제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도 행복해야 할 일이다. 이른 아침 햇살의 미소를 생각하며 걷는다. 오후의 인생! 마음 같아서는 미소를 머금으며 ‘오늘도 걷는다마는…’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다. 갈수록 살아갈 날들을 위한 기도도 절실할 것 같다. 마음 같아서는 아참햇살의 품 같은 죽음의 품에 안기고 싶다. ‘지금 불행한가? 아니 외로운가. 그러면 책을 들어라.’라는 생각과 함께 인생의 행복한 오후의 길을 걷고 싶다.

김경희
저작권자 © 경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흥덕4로 15번길 3-11 (영덕동 1111-2) 경기신문사 | 대표전화 : 031) 268-8114 | 팩스 : 031) 268-8393 | 청소년보호책임자 : 엄순엽 법인명 : ㈜경기신문사 | 제호 : 경기신문 | 등록번호 : 경기 가 00006 | 등록일 : 2002-04-06 | 발행일 : 2002-04-06 | 발행인·편집인 : 김대훈 | ISSN 2635-9790 경기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Copyright © 2020 경기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kg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