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월은 연꽃이 가장 아름답게 피어나는 계절이다. 물 위에 연꽃이 피면 어김없이 떠오르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심청이가 용궁에서 연꽃을 타고 다시 세상으로 나왔다는 전설이다. 그런데 과연 이 이야기의 진짜 무대는 어디일까?
심청전의 실제 배경이 되는 곳이 바로 서해 끝자락의 섬, 백령도다.
인당수의 거친 물살과 연화 바위의 신비로운 전설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그곳에는 심청의 흔적들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백령도는 우리나라에서 여덟 번째로 큰 섬으로 인천에서 직선거리로 230㎞ 떨어진 서해 끝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북한 황해도 장연군과는 고작 10㎞ 이내로 맑은 날이면 북한 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 백령도 고봉포에서 장연군 덕동포로 오가는 배가 있었다. 1926년에는 대청도~백령도~덕동포를 잇는 정기항로가 격일로 운항했고, 1933년에는 30톤급 발동선 두 척이 바다를 가로질렀다. 1938년 장연군 출신 김석춘 등이 이 항로를 인수해 8·15 광복 직전까지 운항했다.
해방 전 백령도 주민들은 몽금포와 덕동포, 구미포를 통해 당시 가장 큰 오일장이 열리던 장연읍에서 생필품과 공산품을 사들였다.
하지만 분단 후 장연을 갈 수 없게 되자 옹진군 읍저를 거쳐 옹진 오일장을 이용했으나 6·25 이후 남북 분단으로 모든 교류가 끊어졌다. 지금은 인천에서 정기 운항하는 배편을 통해 생활용품을 조달하고 있다.
백령도는 해방 전까지 북한의 장연군의 생활문화권에 속해 있었고, 육로나 배를 이용해 사리원이나 황주, 평양 등과 교류했다. 황주는 백령도에서 몽금포를 거쳐 배를 타고 남포를 지나 수로를 통한 뱃길이 있었다.
심청전은 바로 이 백령도를 무대로 펼쳐지는 설화다.
봉산 출신 박만춘이 판소리를 처음 시작할 때, 심청이 황주에서 태어났다는 내용으로 심청가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몽금포는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와 세례가 시작된 의미 깊은 땅으로 언더우드 등 서양 선교사들의 휴양지로도 사용되었다.

백령도에는 심청설화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백령도가 심청전의 근원지임을 밝히기 위해 오랜 연구를 해온 학자가 바로 최운식 교수다.
심청전에 나오는 공양미 삼백 석을 바친 곳은 몽은사라는 절이라고 한다.
심청이를 태운 배가 출발한 곳이 바로 백령도 장천 포구이다. 이 포구에서 심청이 중국 상인들에게 팔려 배를 타고 가다가 인당수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북한의 장산곶과 백령도 사이 바다를 인당수라 부르는데, 물살이 매우 빠르기로 유명하다.

심청이 세상을 떠난 후 용궁에서 연꽃을 타고 나온 마을이 연화리 해안이라고 한다. 연화리 해안 근처에는 천안함 위령탑이 있다.
심청전은 태몽 설화와 효행 설화, 재생 설화, 그리고 아버지가 놀라서 눈을 뜨게 되었다는 개안 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백령도 심청 설화는 판소리 심청전을 들은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하면서 백령도 지역의 지리적 배경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구전설화로 발전했다.
한편 전남 곡성에서는 심청의 생가를 복원하고 2000년부터 심청 축제를 열고 있다. 관음사 연기설화를 근거로 하여 심청을 설화 속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로 보고 아버지 원랑과 함께 곡성에서 살았다고 주장한다.
심청전은 백령도를 중심으로 한 설화로 알려졌지만, 전남 곡성에서는 실존 인물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중국은 닝보에서 온 전래 설화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중국 닝보에는 심청각이 세워져 있다.
심청전은 남·북한과 중국을 아우르고 국경을 넘나드는 설화이다. 백령도를 중심으로 하는 심청 설화의 중요성이 있다.
지난 7월 중순 심청각을 찾았는데, 초기에 마련된 내용들로 최근 연구 성과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지어 2층은 냉방기가 고장 난 채 방치돼 있었다. 심청의 최신 연구 성과를 담은 콘텐츠 보강이 필요하다.
백령도 생산되는 특산물에 ‘심청’ 브랜드를 추가하고, 곧 들어설 백령공항 이름을 ‘백령 심청 공항’으로 명명하면 어떨까?
글 : 김용구 박사(인천시 사회적경제지원센터장, 인천시 섬발전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