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에세이] 가을엔 내 마음도 물들고 싶다

2025.10.15 06:00:00 13면

 

‘그래! 저 모습이야. 아니 저렇듯 편안한 얼굴이어야 하는데-’ 한마디로 화안(和顔)이었다. 강의가 있어 가는 아침 길이다. 서서히 차를 몰고 가는데 국화꽃 위로 국화 빛 낙엽이 하나 둘 내려앉고 있다. 차창 밖 오른쪽의 인도였다. 30대 중반쯤 되었을까. 한 젊은 여인이 작업할 때 열고 쓰는 큼직한 가방을 멘 채, 오른손에는 작은 가방을 들고 걸어가고 있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다. 그런데 얼굴을 보니 둥근달을 생각나게 한다. 복스럽게 생긴 모습이랄까! 균형 잡힌 몸에 결 고운 얼굴은 더없이 편안해 보였다. 오늘 하루의 피곤이나 삶에 대한 무게감도 엿보이지 않았다. 담담한 표정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였는지 모를 일이다. 편안한 모습과 근심 없는 마음을 신경 써온 탓이리라. 진정 저렇듯 편안한 얼굴이 그리워서였을 것이다.

 

문득 내 어머니의 편안했던 모습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아들 하나뿐인 게 죄인 양, 바람이 불거나 비가 오거나 조마조마하시면서 나를 기르셨다. 그런데 아들이 편안하게 산다기보다 척박한 땅에 개척정신으로 뿌리내리는데 힘들어하는 모양새가 안타까우셨을 것이다. 그렇게 지내던 어느 날이었다. 내가 『문학의 이해와 수필의 길』이란 도서를 발간해 교육문화회관과 덕진문학관에서 강의한 내용을 JTV 방송에서 촬영해 방송할 때다. 그 장면을 거실에서 시청하고 있는데 어머님이 보시고 ‘네가 저렇게 활동하는구나!’하시면서 미소를 보이셨다. 그리고 몇 년 뒤 어머니는 내 곁을 영영 떠나셨다. 나에게도 한순간 이마의 주름이 펴지고 마음 근육이 가벼워지는 때가 있었다. 아이엠에프 때다. 아들이 어느 방송사 입사시험을 응시했는데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통지서를 받았을 때였다. 마음 속 주름이 펴지는 감각이었다.

 

지난 9월 9일 정오, ‘한가람’이라는 음식점에서 우리는 만났다. 고향 벗으로서 부부 모임이었다, 열두 명 중, 두 사람은 배우자를 잃었고 수술을 받았거나 매우 불편한 친구도 있었다. 그래도 어릴 적부터의 친구들이 한 도시로 나와 직장 생활을 하다 정년하고 고희를 넘기기까지 벗해온 생명들이다. 인생의 고요한 시간 속에서 은근한 정을 앞세워 만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요 축복받을 만한 생명들의 인연이다.

 

그날 나는 총무라고 평소 안 하던 말도 좀 하고, 커피도 사람 수대로 뽑아다 코앞에 놔드리면서 정성을 다했다. 그때다 내 곁에 있던 한의원 원장 부인이 자기 곁에 앉아 있는 K 친구 부인 뒷머리 스타일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나는 K 친구에게 ‘자네 부인은 S여고 3년생 같네. 단발머리가 증명하고 있어!’라고 했다. 친구들은 한바탕 웃었고 모임 분위기는 살아났다. 나는 아는 듯 모르는 듯 부인들에게 죽염 사탕도 하나씩 드리기도 했다. 머리에 흰 구름을 이고 살면서 폼 잡고 젊잖아 해본들 무슨 변수가 있고 특별한 복이 달라붙겠는가.

 

숲을 한동안 걷다 오른쪽으로 기우는 산허리 능선 길로 접어들었다. 그런데 팔뚝 굵기의 가지가 큰 나뭇가지에서 꺾이어져 길 앞에 떨어져 있다. 하늘 향해 곧게 솟아오른 나무는 외형상 크게 표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나무 가지와 뿌리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자녀를 잃었다거나 큰 상처를 입고서도 말 못 하는 부모의 가슴이 나무뿌리 의식일 것이다. 라는 생각이었다.

 

밥 먹기 위해 내가 걸었던 길을 뒤돌아보면 내 시간에는 이끼 낄 날이 없었다. 나이가 불어나고 넘치면 황혼이 지나 어둠이 내리듯 주위는 적막하다. 그만큼 영글고 견디고 물들지 않으면 혼자서 견뎌낼 수밖에 없다. 육신의 힘이 빠져버린 대신 자신을 지키는 정신으로 하루하루를 고개 넘듯 살아내야 한다. 북극의 곰은 그 굶주림과 죽음을 침묵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시인에게 언어란 문둥병자가 짚고 다니는 지팡이 같은 것이라고 조정권 씨는 말했다. 문학이란 자기를 견디는 방법이자 시대를 견디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며 여기까지 왔다.

 

생전의 구상 시인이 자기 아파트 어린이 놀이터에서 쉬고 있을 때, 한 어린이가 ‘지금 뭐 하세요?’하고 물었다. ‘왜 그런데’ 하고 시인이 반문하니까. 어린이가 하는 말 ‘혼자 노는 소년 같아요.’하더라는 것. 이 말을 생전의 구상 시인은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지는 낙엽, 가는 사람, 사이에서 을씨년스럽다고 ‘가을’이라고 했을까.

 

가을이면 내 마음도 물들고 싶다. 욕심 없이 담담히 내 살아온 업보만큼 내 마음 물들고 싶다. 큰 소나무 속살 빛으로, 아니 나무의 나이테 빛으로 깊이 물들고 싶다.

김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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