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지석영 선생의 묘 입구다. 먼저 여기 연보비의 글을 읽어 보면 개화기 여러 분야의 선구자인 지석영 선생의 삶을 잘 요약해 놓았다.
松村(송촌) 지석영 선생(1855~1935 의학자. 국어학자)
우두 보급의 선구자이며 의학 교육자. 한글 전용을 제창함. 사회, 경제, 문화 각 영역에 걸쳐 선각자. “우리 가족에게 먼저 실험해 보아야 안심하고 쓸 수 있지 않겠느냐.” - ‘1880년 가족에게 우두를 접종하면서’
나이 드신 분들은 초등학교 때 ‘불주사’를 맞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천연두 예방 백신입니다. 송촌이 종두법을 처음 우리나라에 도입하기 전, 천연두는 치사율이 30%를 넘나드는 무서운 전염병이었고, 다행히 나았다고 해도 얼굴에 곰보 자국이 남았다.
90년대에 비디오테이프를 볼 때, 맨 처음에 이런 말이 나왔다. “옛날에는 어린이들에게 호환, 마마, 전쟁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고 지금은 불법 비디오가…”라는 말. 호랑이가 어린아이를 자주 물어가 호환이라고 했고, 마마는 천연두를 뜻한다. 당시에는 치료법이라는 게 나라에서는 제사를 지내고 백성들은 무당굿을 하며 바이러스를 ‘손님’이나 ‘마마’라는 존칭으로 부르며 제발 물러가시라고 비는 것뿐이었다.
천연두(天然痘)는 한의학에서 두창(痘瘡)이라 하는데 콩 크기의 부스럼이라는 뜻이고, ‘천연(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전염병’이란 의미에서 천연두이다. 1796년 영국의 의사 제너가 천연두에 걸린 소에게서 고름을 빼내 사람에게 넣는 우두법을 과학적으로 정립했고, 이는 전 세계로 전파됐다. 일본도 처음에는 두묘(백신)를 수입하다가 1858년 두묘를 만드는 종두소를 설립하고 1876년부터 유아 접종을 의무화했다. 조선에서도 19세기 초 정약용 등이 중국을 통해 인두법과 종두법을 국내에 소개했으나 보급되지는 못했다.
지석영은 서울 낙원동에서 태어났다.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정착한 충주 지씨 시조 지경(池鏡)의 31세손이며 진사(증 참판) 지봉신의 6대손이다. 부친 지익룡은 한의학에 조예가 깊은 분인데 양반이라 개업은 하지 않았다. 생가터 표지판이 낙원상가 북쪽 100미터 길가에 세워져 있다.
지석영은 부친의 친구인 유명한 한의사 박영선에게 한문과 한의학을 배웠다. 박영선은 1876년 1차 수신사(대표 김기수) 일행으로 일본에 가서 구해온 '종두귀감'을 지석영에게 건네며 종두법을 연구해 보라고 권했다. 하지만 책은 이론에 불과하니 두묘와 종두침을 구해 실제 접종을 해봐야 했다.
마침, 부산의 제생의원에서 우두접종을 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제생의원은 일본이 부산 거주 일본인의 치료를 위해 1877년 3월 용두산 기슭에 개원한 의원으로, 의사는 해군 소속 군의관이었고 조선인도 치료했다. 지금의 부산대부속병원으로 이어졌는데, ‘우리나라에 설립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가 설립한’ 최초의 서양식 병원은 1885년의 제중원이다.
1879년 겨울, 지석영은 거의 무전여행으로 걸어서 20일 만에 제생병원에 도착했다. 원장 마쓰마에와 군의관 도츠카를 만나 필담으로 뜻을 전해 승낙을 받고 두 달 동안 한일사전 편찬을 도우며 종두법을 배웠다.
두묘와 종두기계(도구)를 얻고 귀경하는 길에 1880년 2월 5일 처가인 충주군 덕산면에 들렀다. 그곳에서 간신히 장인을 설득해 어린 처남과 동네 아이 40여 명에게 성공적으로 종두를 시술한 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우두접종으로 기록됐다.
그러나 백신을 직접 제조해야 지속적이고 보편적인 접종이 가능하다. 이에 지석영은 1880년 7월 제2차 수신사(대표 김홍집) 일행을 따라갔다. 어릴 때 개화파 강유 선생에게 학문을 배울 당시 김홍집, 김옥균 등과 인연을 맺었던 덕분이다. 도쿄에서 한 달간 머물며 두묘 제조법을 익힌 뒤 귀국해 서울에 종두장을 차리고 우두접종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1882년 임오군란 때 종
두장이 불타는 등, 개화파의 흥망성쇠와 더불어 지석영 또한 같은 운명을 겪어야 했다.
정국이 안정된 후에 다시 종두장을 재건하고 종두법의 필요성을 이해한 관리의 초대로 전주와 공주에 우두국을 설치했다. 이후 제도적 정착을 위해 직접 관직에 나설 필요를 느껴 1883년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으며 1885년에는 종두법에 관한 책 '우두신설'을 저술했다.
그러나 1887년 3월, 지석영이 개혁의 시급성을 논하는 11개 조항의 상소를 올린 것이 화근이 되었다. 민비와 관련된 내용에 고종은 심기가 거슬린 듯 묵묵부답하니, 이 기회에 위정척사파는 지석영을 갑신정변 때의 급진 개화파라고 몰아세웠다. “흉악한 지석영은 우두를 놓는 기술을 가르쳐준다는 구실로 도당을 유인하여 모았으니 또한 그 의도가 무엇인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니, 지석영은 전라도 신지도로 유배됐다.
신지도에서 1892년까지 5년을 보내면서 지석영은 우리나라는 보리농사를 중시해야 한다며 '중맥설'(1888)을 지었고 서양의학의 예방의학서 '신학신설'(1891)도 지었다. 또한 우리나라 최초의 한자사전인 '자전석요'를 짓기 시작해 1909년 발행했는데 1950년대까지 많이 팔렸다고 한다.
1892년 서울에 콜레라와 천연두가 유행하자 고종은 다시 지석영을 불러들였다. 소아과 우두보영당을 설립해 무료 접종을 시작했고, 1894년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자 형조참의, 대구판관, 동래부사, 동래부관찰사 등을 역임하며 개화 정책에 참여했고 1895년의 ‘종두규칙’의 반포로 마침내 종두법의 법제화도 이루게 됐다.
이러한 종두법의 도입으로 지석영은 서양의학의 최초 도입자라는 평가를 받는데,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서양의학의 교육 분야다.
1898년 지석영은 서양 의학교의 설립을 상소하여 1899년 관립 의학교가 설립되고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관립(국립) 의학교는 대한의원 교육부, 경성의전을 거쳐 지금의 서울대 의과대학으로 발전했으니, 지석영은 서울대 의대의 초대 교장인 셈이다. 혜화역 서울의대 의학박물관(옛 대한의원 건물) 앞에 지석영의 동상이 서 있다.
한편 지석영은 상소를 올려 “세종대왕 창제 국문이 표시하지 못하는 음이 없고 매우 배우기 쉬운 글임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그저 민간에 방임한 결과 형식이 정립되지 못했으니 국문을 새로 개정하여 나라의 자주와 부강을 도모”할 것을 건의했다. 정부는 지석영의 제안을 받아들여 1905년 ‘신정국문(新訂國文)’을 공표하고 1907년 국문연구소를 설치했다.
지석영은 이처럼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쌓았으나 1910년 나라가 일제에 강점되자 대한의원 교육부(옛 의학교) 학감을 사임한 뒤, 두문불출 조용히 독서와 저술로 보내다가 1914년 유유당(幼幼堂)이라는 소아과의원을 열어 봉사를 시작했고, 1915년에는 전선의생회(대한한의사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1935년 2월 망우리묘지로 들어왔다.
묘는 산 능선 바로 아래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바라보는 방향으로 왼쪽이 지석영 선생의 묘이다. 비석 앞면에는 ‘松村居士池公錫永之墓(송촌거사지공석영지묘)’라고 새겨 있는데 ‘송촌’이라는 호는 신지도 유배 시 살던 송곡리에서 딴 것이고, ‘거사’는 출가하지 않고 집에서 불교에 귀의한 자에게 붙인다. 지석영은 집에 불상을 모셔놓을 정도로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비석 후면도 한문으로 새겨졌는데, 고인의 한글 사랑을 그대로 이어받아 비문도 한글로 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비문의 번역문은 망우리연구소가 올해 12월에 펴낸 '망우리 비명록'이라는 책에 수록돼 있다.
오른쪽은 장남 춘우거사(春雨居士) 지성주의 묘이다. 낙원동의 유명한 내과의였고 그 아들 지홍창은 서울대 의대를 나온 내과의사로 박정희 대통령 주치의를 지냈으며, 지홍창의 장남 지무영은 가톨릭대 의대를 나와 현재 서울 송파구에 지내과의원을 경영하고 있으니, 고조부로부터 따지면 5대째 의사 가문이다.
'망우리 비명록'에서 지석영 편을 쓴 조운찬 작가는, 지석영의 묘역이 망우리에서 가장 많은 20종가량의 수종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한다. 묘 앞에는 오래된 큰 살구나무가 서 있고 우측에는 물오리나무, 벚나무, 팥배나무가 뒤쪽으로는 자작나무, 잣나무 등이 서 있다. 마치 선생과 같은 선구자 덕분으로 지금 세계적인 수준으로 우뚝 선 우리나라 의학의 모습처럼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