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아의 MZ세대 찍어 먹기] 어른은 서류로 말한다

2026.02.06 06:00:00 15면

 

성인이 된다는 것은 말의 무게를 입술이 아닌 종이 위에 얹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흔히 사회생활에서 '신뢰'를 강조하는데, 신뢰를 지탱하는 가장 강력한 기둥은 서류이다. 인간의 기억은 주관적이며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 재구성되기 마련이다. 감정과 구두 약속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갈등이 발생했을 때 시시비비를 가릴 기준점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 서류는 변하지 않는 객관적 지표이자,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개인들이 합의할 수 있는 유일한 공통분모가 된다.

 

특히 근로계약에서 서류의 중요성이 극명하게 드러난다. 근로기준법상 근로계약서 작성과 교부는 사용자의 엄격한 법적 의무다(근로기준법 제17조). 이를 위반할 경우 사용자는 단순히 과태료를 무는 수준을 넘어 5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이라는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근로기준법 제114조). 이는 국가가 서류의 힘을 빌려 고용 관계의 투명성을 강제하고 있다는 의미다. 따라서 피고용인이 근로계약서 작성을 요구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불신이나 무례함의 표현이 아니라, 법이 보장하는 당연한 권리를 행사하는 정당한 절차다. 임금, 근로 시간, 휴일 등 핵심적인 근로 조건들이 서류라는 단단한 지반 위에 놓일 때 노사 양측은 불필요한 분쟁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서류는 관계를 불신해서 작성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한 오해로부터 관계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부재한 상태에서의 선의는 상황이 악화했을 때 가장 먼저 변질된다.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안일한 태도는 대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결과로 귀결되며, 이는 곧 개인과 관계의 실질적인 손실로 이어진다. 계약서에 적힌 숫자와 문구들은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는 것을 넘어, 발생할 수 있는 위험을 예측하고 그에 대한 책임의 경계를 설정하는 고도의 전략적 행위다. 따라서 서류를 꼼꼼히 챙기는 태도는 까다로움이 아니라, 자기 일에 책임을 지겠다는 전문성과 성숙함의 방증이다.

 

갈등이 임계점을 넘어 법적 절차에 들어섰을 때, 서류의 위력은 더 절대적이다. 법의 언어는 감정의 호소가 아닌, 오직 증명된 사실과 기록된 문장에만 반응한다. 서류가 없는 상태에서의 싸움은 맨손으로 벽을 치는 것과 같다. 단 한 장의 서류라도 확보해야 싸움을 지속할 수 있는 최소한의 거점이 마련된다. 확보된 문서는 법정이라는 전장에서 나를 대신해 싸워주는 가장 충직한 대리인이자 방패가 된다. 계약 당시에는 사소해 보였던 쪽지나 메일 한 통이라도, 객관적 정황과 결합하는 순간 상대방의 변명을 무너뜨리는 결정적 물증으로 탈바꿈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인의 세계에서 서류로 말한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감을 공적으로 증명하는 방식이다. 기록되지 않은 약속은 책임질 수 없는 방종에 가깝고, 기록된 약속만이 비로소 권리와 의무로 인정받는다. 우리는 수많은 갈등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문자의 힘을 깨달아 왔다. 서류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인류가 고안한 가장 지혜로운 방어 기제다. 진정한 어른의 언어는 화려한 수사나 감동적인 연설이 아니라, 담백하고 명확하게 적힌 종이 위에 있다. 기록만이 우리의 노동과 진심, 그리고 권익을 온전히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방패이기 때문이다.

이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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