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우리 사잇길을 걷다 ⑨] 방정환의 은파리, 다시 날아오르다

2026.04.27 13:53:26 16면

 

나는 은파리. 곱게 반짝이는 은빛 옷을 입은 멋진 파리, 은파리(Si lver Fly)다. 나의 눈 은 샛별 같은 천리안이고 나의 몸은 총알보다 빠르며 남에게 보이지 않는 투명화 능력을 비 롯한 많은 초능력을 갖고 있다. 나는 소파 방정환(1899~1931) 선생이 만들어주셔서 1921년 1월 '개벽' 잡지를 통해 세 상에 처음 나왔다. '개벽' 폐간 후에는 '신여성'에 나왔는데 또 이 잡지도 폐간되고 다 시 '별건곤'에 출연했다. 이렇게 세상에 소개된 것만 모두 15여 회. 소파 선생과 함께 친일파 부호 문 아무개 대감의 추잡한 사생활과 위선자인 사회 지도층 인사의 실상을 고발하는 등 당대 사회상을 풍자했고, 때로는 흥미진진한 가십거리를 전해주기도 했다. 얼마나 시원하게 독자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던지, 일경의 검열에 걸려 잡지에 내가 등장하지 않으면 독자들의 원성이 빗발쳤다.

 

 

그러다가 종로경찰서로부터 소파 선생은 불령선인으로, 나는 불령파리로 낙인이 찍혀 계 속 감시받다가 결국 출연 금지 처분을 받았으니 '별건곤' 1927년 3월호가 나의 마지막 등 장이 되었다. 여러분은 소파 선생이 아동문학 글만 쓰신 줄 아는데, 오히려 사회주의자로 오해받을 만큼 사회 개혁을 부르짖은 진보적인 문필가이기도 했다. 그런데 아! 안타깝게도 소파 선생은 자기 몸도 돌보지 못하시고 불철주야 어린이를 위해 헌신하시다가 32세의 젊은 나이로 돌아가셨다. 병석에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에도 “문밖에 검정말이 모는 검정 마차가 날 데리러 왔소. 어린이를 잘 부탁하오.” 라는 말을 남기시고 떠나가시던 1931년 7월 23일의 그 장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홍제동 납골당에 계시다가 1936년 망우리묘지로 왔는데 묘의 모양이 대단히 예술적이다. 흔한 봉분이 아니라 네모난 비석을 세우고 그 아래에 유골을 모신 돌무덤이다.

 

 

김영식 작가 는 '망우리 사잇길에서'라는 저서에서 이 묘비는 당시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이며 조각가 인 김복진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고, 아마 조선공산당의 고위급이었던 김복진과의 친분이 소 파 선생에 누가 될까 봐 아무도 그 사실을 후대에 전하지 않았을 것이라 했다. 묘지 이장에 앞장섰던 후배 최신복은 자기 부모를 소파 선생 묘 아래에 모셨고, 훗날 자 신도 부인과 함께 그 아래로 들어왔다. 최신복 선생 가족만 그런 게 아니라, 사실은 나도 그동안 소파 선생 묘 옆에서 오랜 잠을 자고 있었다. 남들은 내가 죽은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애초 내가 소파 선생에 의해 태어났듯, 나는 그 누구의 부름에 따라 잠을 깨고 다시 글을 통해 소생하는 존재이다. 하지만 예전에도 그 랬듯 아무나 나를 부른다고 함부로 나서지는 않는다. 진정으로 선생을 존경하고 선생을 기 리는 사람의 부름에는 내 잠시 잠을 깨고 등장해 줄 마음은 늘 있었다.

 

나를 불러준 사람은 김영식 작가인데 별명을 ‘ 몽중인(夢中人) ’ 이라고 한다. 감히 소파 선생 필명을 빌려 쓰다니. 하지만 그 또한 꿈이 많은, 꿈을 꾸는 사람이라고 한다. 몽중인 씨는 오래전부터 소파 선생 묘에 꾸준히 찾아오던 사람인데 1990년에는 소파 선생의 건국훈 장 애국장 수훈 소식도 알려줬다. 그가 며칠 전에 찾아와 나를 깨우더니 내가 소파 선생을 위해 능력을 발휘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 전했다. 그래? 선생을 위하는 일에 내가 잠만 자고 있을 수는 없지. 그 중요한 일이 란 뭘까? “중요한 그 일이란 도대체 뭐요?” “아, 예. 그건 차차 말씀드리겠고 그전에 먼저, 은파리 씨는 잘 아시죠? 소파 방정환 선 생이 얼마나 훌륭한 업적을 남기셨는지….” “그야, 다들 아는 사실 아니겠소? 옛날에는 어린이라는 호칭이 없었다오. 그런 시절에 소파 선생이 ‘늙은이’, ‘젊은이’ 처럼 ‘어린이’라는 호칭을 1920년 처음 만드시고 1922년에는 어린이날을 만드셨소. 그리고 1923년 소파 선생은 도쿄에서 친구들과 ‘색동회’를 만들어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 시작하셨는데, 그해에 만든 '어린이'라는 잡지는 훗날 최대 10만 독자를 얻으며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소. 즉 선생은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에 어린이 운동을 통해 독립운동을 하셨던 거라오.”

 

 

몽중인 씨는 잠자코 말을 듣고 있다. 그의 뇌 속을 들여다보니 몽중인 씨는 나를 통해 자 신의 혼란스러운 데이터를 정리하고 있었다. 질문을 던져 당황스럽게 만들어 버릴까? 그냥 말을 잇기로 한다.“ 그리고 잡지 '어린이'를 통해 지금 우리가 부르는 많은 동요를 만들어 주셨는데, 우선 '오빠 생각'이랑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 생각나오? 이 두 노래의 작사가 최순애와 이원수는 '어린이' 잡지를 통해 펜팔을 나누다가 훗날 부부가 되었다는 소식도 들립디다. 인연도 참, 허허. 그리고 윤극영 선생의 '설날'과 '반달'이 있고, 그밖에 '고드름', '따오기', '오뚜기' 등 많은 노래가 바로 '어린이' 잡지를 통해 만들어졌소. 그리고…” “아, 네. 그만하시죠. 저도 잘 아는 사실이니 굳이 설명을 듣자고 한 게 아니라, 은파리 씨 오랜만에 얼어붙은 입 좀 푸시라고 그냥 듣고 있었습니다.” 흠, 나는 다소 마음의 상처를 받고 몽중인 씨의 뇌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지식인에게 종 종 보이는 자만의 세포가 십만 개쯤 보였다. 하지만 몽중인 씨 착한 사람인 듯하니 옥에 티 라고 용서해 주기로 한다. 입을 다물고 몽중인 씨의 말을 기다렸다.“ 그 중요한 일을 은파리 씨가 하셔야 하는데, 먼저 지금 사람들이 소파 선생을 어떻게 대우하고 있는지, 그동안 소파 선생에 대해 어느 정도의 기념사업이 있는지 실상을 보여 드 려야 할 것 같습니다. 산책도 할 겸 잠시 저를 따라나서시죠. ” 정말 오랜만의 외출이다. 나 혼자 축지법으로 날아갈 수도 있지만 시내가 영 딴판으로 바 뀌어서 어디가 어딘지 알 수 없다. 몽중인 씨 어깨에 올라타 버스를 타고 택시를 타고 경성 (지금은 서울이라고?) 시내를 둘러보았다. 선생이 1899년 태어난 야주개(당주동) 집에 가보니 지금은 세종문화회관이라는 건물 뒤편에 ‘소파 방정환 선생 나신 곳’ 이라는 기념비만 서 있고, 선생이 돌아가시기 전에 살던 집(소격동)도 칼국수집의 표지판 하나가 집터였음을 알리고 있다.

 

 

아아, 선생을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곳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날이 저물기 시작하여 망우리로 돌아오는 길에 몽 중인 씨는 이렇게 말했다.“ 선생의 흔적은 다 사라졌습니다. 색동회 동료 윤극영 선생의 수유동 집은 서울미래유산 1호로 남아 있는데 소파 선생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리고 은파리 씨 시절에는 없 었지만 요즘 어린이들은 체험학습이란 것을 합니다. 박물관, 미술관, 기념관 등에 자주 가 죠. 그런데 말입니다. 많은 독립지사와 문화예술인의 기념관은 여기저기 있는데, 소파 선생의 기념관은 아직 어디에도 없습니다.” “ 그럴 리가?! ”나는 충격에 휩싸여 순간 말이 막혔다. 우리나라의 소파 선생에 대한 대 우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가?“ 그래서 말입니다. 아무래도 은파리 씨가 다시 적극적으로 초능력을 발휘해 활동해 주셔 야겠습니다. 요즘 우리 어린 세대에게 먹힐 수 있는 애니메이션을 하나 만들게 하여 주인공 으로 출연하시죠. 그게 기폭제가 되어…” 아, 나의 할 일이란 바로 이것인가. 당분간 바쁘겠는걸. 관계자들을 찾아가 눈앞에서 날 개를 퍼덕여 모티베이션을 집어넣고, 나아가 행동의 추진력을 불러일으키는 일. 백여 년간 쓰지 않고 축적한 나의 초능력을 모두 발휘해야지.“ 잘 알겠소, 그쯤이야 대수롭지 않소. 내가 이 일을 무사히 마무리하고 마침내 소파 기 념관이 세워지는 그 날, 기념관 뒤뜰에 작은 송덕비 하나 세워 주시길.” 나는 우선 몽중인 씨가 나를 소개하는 이 글에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초능력 하 나를 심어 주기로 약속하고 망우리로 돌아왔다. 돌아온 나는 다음의 주문을 이 글에 심었 다.

 

“Super Power #260428 inspi rat ion ON” (주: 이 글은 필자의 '망우리 사잇길에서'(2023)에 실린 글을 수정한 것이다)

 

[ 경기신문 = 서혜주 기자 ]

김영식 망우리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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