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범의 미디어비평] 언론의 보이스피싱

2026.04.30 06:00:00 15면

 

40년 지기 친구가 겪은 일이다. 자신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앞자리를 정확히 읊으며 “카드가 배송 중”이라는 전화가 왔다. 신청한 적 없다고 답하자, 고객센터 번호까지 친절히 안내했다. 굴지의 대기업 카드사 이름을 판 신종 보이스피싱이다. 2025년 대한민국의 보이스피싱 피해액이 1조 1330억 원을 넘었다. 통계 작성 이래 사상 최대치다. 교묘한 심리 조작과 정보 비대칭을 이용해 타인의 재산을 훔치는 이 비열한 사기 행각은,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우리 언론의 자화상을 비춘다.

 

독자의 클릭을 노리는 ‘어뷰징(Abusing)’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20년 전부터 지적돼 온 어뷰징은 이제 단순한 기사 복제를 넘어 ‘제목 장사’라는 교묘한 기만술로 진화했다. 2007년 MBC ‘무릎팍도사’에 출연한 양준혁의 발언을 수십 개의 기사로 쪼개어 포털을 도배했던 행태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자극적으로 변주되고 있다.

 

27일 TV CHOSUN ‘조선의 사랑꾼’에 출연한 가수 배기성의 기사가 전형이다. “8일 연속 임신 노력했다가... 배기성 3개월째 난청, 청각장애 위기”라는 제목의 기사가 포털 다음 메인을 장식했다. 선정적인 사진은 필수 옵션이다. 방송인의 말을 토대로 확대 재생산하고 독자의 눈길을 끄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보이스피싱의 ‘낚시’와 다르지 않다. ‘낚시 기사’라는 말의 유래이기도 하다. 정보 서비스가 아닌 속임수를 전제하고 있다.

 

포털 다음(Daum)이 2020년, 네이버가 1년 뒤 실시간 급상승 검색어를 폐지했다. 여론 조작과 상업적 어뷰징으로 인한 신뢰 저하 때문이었다. 그러나 지난 3월 다음은 6년 만에 실검을 부활했다. 언론은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독자를 기만한다.

 

미국 리얼리티 프로그램 내용을 국내 인기 방송인의 비극인 것처럼 착각하게 해 클릭을 유도한다. 정치인 임종석과 동명이인인 가스기술공사 신임 사장 기사를 내보내며 독자를 혼란에 빠뜨린다. 제목으로 클릭을 낚는 행위는 독자와의 신뢰 계약을 정면으로 파괴하는 행위다.

 

더 우려스러운 것은 ‘단독’ ‘속보’라는 타이틀의 오남용이다. 공공성과 뉴스 가치가 큰 정보에 제한적으로 쓰여야 할 ‘단독’은 이제 연예 가십부터 정치 뉴스까지 전방위로 침투했다. 본질적으로 단독일 수밖에 없는 기획 기사에조차 단독 딱지를 붙인다. 정보가 특별한 가치를 지닌 것처럼 착각하게 만드는 기만행위다. 보이스피싱범이 ‘카드 발급’이라는 거짓 명분으로 수신자의 불안을 자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주의력 약탈’이다.

 

디지털 플랫폼은 급변하고 있다. 이제는 AI라는 거대한 파도가 휩쓸고 있다. 이 변화는 저널리즘이 심층 취재와 본질적 가치에 집중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일부이지만 새로운 플랫폼을 활용해 더 깊은 통찰을 제공하기는커녕, 포털 알고리즘에 기생하여 스스로 품격을 떨어뜨리는 ‘어뷰징의 늪’에 빠져 있다.

 

보이스피싱은 타인의 재산을 노린다. 어뷰징은 타인의 시간과 신뢰를 훔친다. 전자가 법적 처벌을 받는 범죄라면, 후자는 저널리즘의 도덕적 파산이다. 독자의 신뢰를 헐값에 팔아넘기고 기만으로 쌓은 조회수는 언론의 무덤이다. 언론이 ‘진실의 보루’가 아닌 ‘클릭 장사꾼’으로 전락시킨다면, 저널리즘이 설 자리는 없다. 지금 즉시 멈춰야 한다. 그것이 언론이 살길이다.

최광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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