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주어진 책무는 크고 무겁다. 선관위는 선거와 국민투표를 공정하게 관리하는 등 본령이 중차대하기에 독립된 합의제 헌법기관이다. 행정부, 국회, 법원 등 다른 국가기관의 간섭 없이 중립적인 권한을 행사한다. 대의민주주의 정당성 유지의 근간이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6·3 지방선거 중 서울 송파구와 강남구·광진구·동작구 등 50여 곳의 투표소에서 투표지 부족 사태가 발생해 선관위의 공직 기강과 윤리가 땅에 떨어진 현실에 개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
선진국을 자처하는 대한민국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올해는 선관위 창립 60돌이다. 이에 전직 선관위 직원들마저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발생했다며 의아해할 정도다. 사전투표율이 높을 경우 예산 절감 차원에서 유권자의 70%만 인쇄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며 그래도 100% 인쇄해 두는 게 원칙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일부 주장처럼 ‘부정선거’는 아니라고 본다. 이준석 개혁신당 대표도 지적했듯 “선관위의 총체적 무능 문제”일 뿐이기에 이런 관점에서 접근하는 게 온당하다고 하겠다. 부정선거론을 말하던 사람들이 햇수로 7년째 미는 시나리오는 사전투표를 미상의 주체가 미상의 시간에 미상의 방법으로 조작했다고 주장하지만 이번에 발생한 사건은 사안의 본질이 완전히 다르다.
지금까지의 부정선거론은 ‘들키지 않게’ 하려고 중국 해커 등 복잡한 기작을 이야기해 왔는데, 지금 와서 ‘대놓고 투표용지를 적게 준비했다’고 하면 7년간 해온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가 된다는 지적이다. 보수 우세 지역이라서 문제가 발생했다는 식의 인과관계를 찾을 게 아니라, 초고밀도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왜 이런 현상이 벌어졌는지 따져보는 것이 합리적 문제의식일 것이다.
예컨대 경기 화성시 동탄은 초고밀도 아파트 단지 중심 도시로 주민센터보다 아파트 내 투표소 접근성이 높아 본투표 참여율이 높은 특성이 있음에도 선관위가 이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해 투표용지가 부족해진 것이라는 지적을 눈여겨봐야 한다.
물론 투표용지 부족으로 유권자의 투표권이 침해된 것은 단순한 선관위의 관리 소홀을 넘어 직무상 과실에 해당하기에 상응하는 법적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노태악 선관위원장과 허철훈 사무총장이 동반 사퇴했지만,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수사와 국회 국정조사 등을 통해 투표용지 부족으로 인해 발생한 투표 대기자 처리 방식의 적절성, 투표 시간 연장 이후 투표 진행 절차의 규정 위반 여부 등까지 포괄적으로 검증해 실체를 명백히 규명해야 한다.
선거 준비 단계에서 투표용지가 부족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면서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거나, 투표 당일 예상보다 높은 투표율에 투표용지 부족 상황을 우려하는 선관위 내부 보고 등이 있었음에도 대응을 하지 않은 사실이 드러나면 포괄적 의미의 고의성으로 인정될 가능성이 있다.
고의성이 입증되면 엄중 문책해야 한다. 투표용지 부족으로 일부 유권자가 투표를 포기하거나, 투표 시간이 끝난 이후에도 늦은 저녁까지 투표하기 위해 대기한 상황도 선관위의 법적 책임으로 이어질 소지가 있다. 공직선거법(제242조 2항)은 “정당한 사유 없이 투표자의 투표를 간섭하거나 방해한 사람”을 3년 이하 징역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얼빠진 선관위’는 혁신돼야 한다. 이번 일에 앞서 ‘소쿠리 사전투표’, 투표용지 외부 반출 등으로 국민적 지탄을 받은 바 있다. 어디 그뿐인가. 불법적 고용 세습에 고위직부터 중간 간부에 이르기까지 서로 청탁하고 눈감아 주는 짬짜미 채용 행태로 불신을 받았던 터다. 이번 기회에 선관위가 수행하는 업무를 재조정해 선거 업무를 관장하는 새 기구를 두는 등 해체에 버금가는 정도의 개혁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의 꽃은 국민이 직접, 비밀, 보통, 평등하게 대리인들을 선출하는 데 있다. 그렇다면 투표는 투명하고 공정한 절차를 통해 결과를 도출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