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만한 게 무엇 하나 있을까.
지난 것들이 그러한데 다가올 것들이라고 별다르겠어. 오늘 막히는 숨은 어제 뱉어낸 숨이 아니야. 지금 돋은 허기가 그때 삭인 허기와 다르듯이. 통과나 도달이라는 것도 지나고 나면 그뿐이었어. 현재라는 그림 속엔 남아있지 않아. 떠나버린 버스처럼 벌써 사라지고 없지. 매듭이나 풀림 같은 것도 허망하긴 마찬가지야. 나와 당신의 헛헛함이 만들어낸 헛것이니까. 둥실 떠오르는 풍선처럼, 언젠간 풍 하고 사라지고 말지.
인정하기로 했어. 만만찮음을 거부할 단어가 내 머릿속엔 없어. 팔과 다리와 뱃속에도 없지. 꿀꺽 씹어 삼킨다고 생겨날 게 아니잖아. 당신은 어때. 내가 보듬는 시간은 늘 만만찮아. 가슴을 열기 무섭게 숨소리처럼 걸어들어와. 넋이 나간 건 시곗바늘만이 아니라서 사람도 시절 따라 비틀거리곤 해. 비틀거림은 세상살이와 어울리지 않아. 반소매에 슬리퍼를 끌어도 열에 들떠서, 당신을 찾아 지하철에 몸을 싣곤 하지. 안내 방송은 기어코 종착역을 알리는데 창밖에는 당신이 없어. 보이는 거라곤 흔들리는 네온사인뿐이야.
겨울이 싫다고 봄이 되게 할 순 없잖아.
싫어서 되돌릴 수 있는 건 사람 바깥의 능력이야. 잠깐도 되돌릴 수 없는데 영원을 되돌릴 수 있겠어. 그런 건 억지야. 영원을 향해 나아가는 버스를 나는 타본 적 없어. 되돌림이라는 거리는 당신과 내가 가진 교통카드 한도 너머야. 열차나 비행기로도 닿을 수 없지. 젊음이나 청춘 같은 거리도 마찬가지야. 우리가 사는 시간에서는 끝내 돌이킬 수 없어. 사전에만 적혀 있는 주소 같은 거랄까. 그래서 사람들은 없는 길을 꿈꾸는 건지도 몰라.
건망이란 것도 모두 나쁜 건 아니야. 지난 걸 지나간 자리 너머로 밀어 넣어 주잖아. 그늘진 자리에 이끼가 스미듯, 닳아버린 기억을 어둠 저편으로 옮겨주는 거지. 굳이 축복일 것까진 없지만 애써 밀어낼 무엇도 아니야. 그러니 당신, 건망과 망각을 양손에 올려놓고 저울질하진 말기로 해. 기억해야 할 운명은, 떠나는 자보다 남겨지는 자의 몫일 수 있으니까. 닳은 만큼 무뎌지는 게 쓰라림이라면, 우리도 언젠가는 조금 덜 아파질 날이 올 거야.
까무러치다 응급실에 실려 갔을 때도 그랬어.
온갖 사진을 찍어대더니 의사가 그러는 거야. 쪼끄만 돌이 요관을 막았다고. 사진을 보니 정말이더라. 그런데 있잖아. 그런 돌이 양쪽 신장에 깨알처럼 박혀있어. 순번을 기다리는 손님 같달까. 다행인 건, 신장은 아픔을 못 느낀다는 거야. 돌이 신장에서 떨어져나온 순간 죽음이지. 지옥의 맛이 똑 그래. 사진에 박힌 아픔을 눈으로 봐서 그랬을까. 응급실을 나서는데 발걸음이 가볍더라. 그냥 콩팥에 붙은 떡고물 같았거든. 시루떡에 묻은 하얀 콩고물 말이야.
며칠 뒤엔 등 쓰러 갔어. 부처님 오신 날이라기에. 많이도 왔더라. 그들도 나 같았겠지. 평생 일만 하며 살았으니, 이젠 돈만 벌게 해 달라고. 집만 사게 해 달라고. 자식만 낳게 해 달라고. 결혼만 하게 해 달라고. 취직만 하게 해 달라고. 합격만 하게 해 달라고. 해 달라고. 또 해 달라고... 나도 따라서 빌까 하다가, 염치가 없어서 절만 하고 왔어. 헤아려보니 육십 년이더라. 날짜로 따지면 2만 일을 넘게 살았어. 이만하면 잘 살았지 싶어. 그렇잖아. 당신이나 나나, 이만하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