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원행을묘 백리길] 시흥행궁에 도착하다

2026.07.30 06:00:00 15면

 

옛날에는 지하철 2호선의 구로디지털단지역 부근의 도림천을 마장내(馬場川)라고 불렀고 그 위에 마장내다리(馬場川橋)가 있었다. 지금은 당연히 사라져 없으며 도림천까지 복개되었다. 장승배기에서 시흥 땅에 들어선 원행을묘 백리길은 시흥대로를 따라 지하철 2호선과 내부순환도로의 시흥IC를 지나 문성초등학교 버스 정류장에 이르는데, ‘원행정례’에서는 이곳을 문성골 앞길(文聖洞前路)이라 기록했다. 여기서 정조는 푸른 천으로 가린 쉼터(靑布帳)를 설치하고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잠시 쉬시도록 하면서 문후를 살피고 미음(죽)을 올렸다. 그리고는 이렇게 명했다.

 

“내가 시흥행궁에 먼저 가서 친히 살필 것이니 호위하는 자와 관리들은 지금처럼 어머니의 가마를 잘 모시고, 병방승지(兵房承旨)와 사관(史官)만 나의 뒤를 따르라.”

 

정조는 시흥행궁에 먼저 도착하여 어머니께서 머물 여기저기를 두루두루 꼼꼼하게 살피고는 어머니의 가마가 도착하는 곳마다 말 탄 척후병들이 차례로 출발하여 달려와서 보고하도록 했다. 어머니의 가마가 행궁의 문밖에 이르렀고 공손하게 모시고 들어왔다. 저녁 식사가 올라오자 혹시 어머니의 음식에 문제는 없는지 직접 살펴 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다.

 

“날씨가 맑고 화창하여 (가마를 오래 타신) 어머니의 상황이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주 평안하시니 기쁘고 행복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다.”

 

이어 승지, 사관, 규장각 각신, 호송한 여러 신하들에게 음식을 내리며 한 말씀 더 했다.

 

“이 음식은 어머니께서 내리신 것이니 각자 마음껏 들도록 하라.”

 

‘원행을묘정리의궤’에 기록된 정조의 말과 행동에는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향한 효심이 가득했다.

 

문성초등학교 정류장을 지난 원행을묘 백리길은 시흥사거리에서 동쪽으로 꺾어 800m쯤 가면 드디어 첫날의 목적지인 시흥행궁터다. 천연기념물 지정일 1968년 기준 830년 된 둘레 8m 이상의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가 ‘동헌관아자리’의 표지석, 4개의 선정비와 함께 서 있다. 1968년에서 830년을 빼면 1138년이고, 2026년으로부터는 888년 전이다.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이 각각 1126년과 1135년에 일어났으니, 얼마나 오랜 세월인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세월에 경의를 표하듯 동서 600m의 거리에는 은행나무○○○. ○○○은행나무점 등 수십 개의 은행나무 이름이 건물과 지명에 가득하다. 아마 서울에서 이런 곳을 찾기도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은행나무를 중심으로 지방관이 업무를 보던 동헌(東軒), 임금을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향해 절을 하는 향망궐배(向望闕拜)의 충성 의식을 거행하던 객사(客舍) 등 각종 관아와 시흥행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건물 한 채도 남아 있지 않은데, 시흥행궁은 1858년 1월 화재로 불탄 후 재건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적으로 335개의 고을이 있었고, 필자는 휴전선 이남의 고을 읍치(邑治, 중심지) 대부분을 가봤다. 모진 세월을 이기지 못해 관아가 온전히 남아있는 곳이 거의 없어 많이 아쉬웠다. 하지만 그런 파괴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대한민국의 번영도 있기 어려웠기에 너무 자책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시흥 읍치처럼 향교까지 사라진 고을은 본 적이 없는데, 언젠가 시흥 향교와 행궁만이라도 복원되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이기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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