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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작품이 놓이기 안전한 장소

 

1937년 독일에서는 112명의 작가의 작품 1만7천여점이 처형되어버리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난다. 히틀러는 독일 내의 현대미술 작품들을 압수한 다음 비독일적이고 타락했다는 죄목을 씌어 ‘퇴폐미술전’이라는 전람회에 걸어두었다가, 순회전이 끝난 후 이를 소각시켜버렸다. 운 좋게 경매를 통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간 작품도 일부 있었다. 당시 독일에 위치하고 있었던 전위적인 모든 작품이 탄핵의 대상이 되었으며, 퇴폐미술가로 지목된 작가들 중에는 피카소, 샤갈, 코코슈카, 칸딘스키, 뭉크, 클레, 마르크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미술이 정치에 봉사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는 극단적인 판단 하에 행해진 이 사건은 그토록 많은 명작이 유실되었다는 안타까움과 함께, 수많은 고결한 인격이 일시에 순교에 처해지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미술사에 남겼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39년 뉴욕에서는 현대미술관(MOMA)이 필립 구드윈과 에드워드 스톤이 설계한 새로운 개념의 건물을 새로 얻게 된다. 전시기획에 따라 가벽을 이동시키며 공간을 구획시킬 수 있는 유동적인 형태의 화이트큐브였다. 그전에 모마는 독일의 퇴폐미술전 경매에 부쳐진 작품 2천점을 획득하는 행운을 거머쥐기도 했었다. 당시 미국 미술은 세계대전과 파시즘을 피해 유럽에서 유입된 예술가들의 진취적인 활동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으며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했었다. 그보다 더 일찍이 서구 미술계에는 화이트큐브라는 공간 형태가 작품을 관람하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한다는 믿음이 확고해졌는데, 이는 작품이 실내장식품 혹은 정치적인 도구로서의 지위를 벗어나 본연의 가치를 획득했던 것과 결부되어 있다.

‘퇴폐미술전’에서 순교의 대상이 되었던 현대미술 작품은 이제 경외의 대상이 되어 공간을 점유하게 되었으며, 간혹 어떤 전시는 예배당과 같이 경건하고 종교적인 분위기가 흐르기도 했다. 마크 로스코는 전시공간이 신성한 곳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그러한 분위기를 연출하기 위해 미술관 측에 까다로운 조명 여건을 요구하기로 악명이 높았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압도적인 크기의 세 개의 연작, 즉 삼면화를 즐겨 그렸는데 이 역시 종교적 공간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화이트큐브가 또 다른 방식의 작품 처형대라는 반성이 곧 일기 시작했다. 화이트큐브는 가치중립적인 공간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사실 그렇지가 않았다. 화이트큐브는 작품을 사회적인 배경과 맥락으로부터 떨어트려야 할 존재, 시각적인 순수함과 완결성을 지녀야 하는 존재로 가정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벽에 걸렸을 때 가장 보기 좋은 작품을 선별할 수 있도록 설계된 상업성을 띤 공간이기도 했다. 현대미술은 늘 미술시장과 미술제도에 대한 비판으로 일관했지만, 결국 그러한 발언을 하는 모든 작품들이 화이트큐브로 흡수되는 아이러니가 벌어졌다. 저항적인 성격을 띠었거나, 사회적인 맥락과 역사를 중요시하는 작품, 특정의 시대나 장소와 긴히 호흡하는 작품들의 경우 화이트큐브라는 전시 환경은 치명적일 수가 있다.

파시즘과 전쟁의 짙은 상흔을 띤 독일에서 다시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다. 1955년, 전쟁으로 폐허된 도시 카셀을 예술로써 복구하고 예술가의 자유로운 실험과 표현을 존중함으로써 과거 나치즘의 행적을 치유하기 위한 ‘카셀 도큐멘타’가 생긴 것이다. 통일 후에는 공산주의의 흔적이 남아있는 동베를린의 시가지에서 ‘베를린 비엔날레’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고통과 상처가 얼룩진 장소와 교감하며 작가들은 예술의 본질을 연구하고, 사회와 동떨어지지 않고 유기적으로 연결된 작품을 창작할 수 있게 된다. 일본의 에치고츠마리 트리엔날레와 같이 대지 위에서 자연을 캔버스 삼아 하는 전시도 생겨났고, 우리나라에도 1990년대 ‘광주 비엔날레’가 탄생했다.

하지만 비엔날레, 트리엔날레, 도큐멘타와 같은 전시형식에도 복병은 있어서 간혹 예산이나 후원금이 일정치 않아 존폐위기에 처하기도 하고 후원자의 부당한 요구를 받기도 하며, 실험과 혁신보다는 자본에 의한 마케팅이 판치기도 한다. 이제 작품들은 원한다면 비좁은 전시장을 빠져나와 세상을 유영하기도 하고, 자신이 있어야 할 장소를 발견하면 그곳에 안착할 수도 있게 되었지만, 아직 완전한 자유로움은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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