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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용인문화유산 시즌2… ‘유학자의 향기’ 따라 걷는 인문 여행

심곡서원부터 정몽주·조광조 묘역까지… 선현의 학문과 충절 깃든 길

‘용인문화유산 시즌2’를 시작한다. 시즌1이 시대별 고증 중심이었다면, 시즌2는 주제별로 묶은 문화유산을 소개한다. ▲유학자의 향기 ▲실학자들 ▲불교문화 ▲피로 쓴 천주교 역사 ▲경기도 명품 유물 ▲부록 등으로 구성된다. [편집자 주]

 

①유학자의 향기

 

 

향교·서원과 유학자의 자취를 따라 가는 코스다.

 

심곡서원(사적)~조광조 묘 및 신도비(도 기념물)~충렬서원(도 유형문화유산)~정몽주선생 묘(도 기념물) ~ 이재선생묘(시 향토문화유산)로 이어진다.

 

심곡서원은 조선 중기 중종대의 학자이며 정치가인 정암 조광조趙光祖(1482∼1519) 선생의 뜻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조광조는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사림파의 대표로 활약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정치를 추진하다가 기묘사화로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했다.

 

조광조의 위패는 원래 정몽주를 배향한 충렬서원에 모셔져 있었는데, 효종 1년(1650) 지방 유림들에 의해 조광조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한 서원이 설립되면서 옮겨졌다. 양팽손(1488~1545, 조선 중기의 문신)을 함께 배향했다. 같은 해 효종이 ‘심곡’이라는 현판과 토지·노비 등을 하사해 심곡서원은 사액서원이 됐다. 이곳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무사했던 전국 47개 서원 중 하나로 선현에 대한 제사와 지방교육을 담당했다.

 

심곡서원은 상현마을(수지구 심곡로 16-9)에 자리하고 있으며, 서원 입구의 홍살문과 외삼문·강당·내삼문·사우(사당)가 거의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다. 강당은 서원의 주요 행사와 유림들의 회의·학문 토론 공간으로 사용됐으며 각 칸마다 널문을 달아 사면을 전부 열 수 있게 했다. 강당 안에는 숙종의 어제어필이 담긴 현판과 서원의 규약 등이 걸려 있다. 강당 옆에는 서원의 책과 문서가 보관된 장서각이 있고, 제사를 준비하는 재실이자 배향객들의 숙소로도 사용된 고직사가 있다.

 

가장 보존상태가 좋은 건물인 사당은 앞면에 트인 퇴칸이 있으며, 옆면과 뒷면에는 화방벽을 설치했다. 정면 3칸·측면 2칸의 크기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이곳에서는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제사를 올리고 있다. 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담장은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았으며, 내삼문은 3칸의 솟을대문 형식이다. 사당 뒤에는 수령 500여 년 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경기도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조광조 묘 및 신도비는 조선 중종 때의 개혁 정치가 조광조의 묘소다. 조광조(1482∼1519)는 문신이자 성리학자로 본관은 한양, 자는 효직이며, 호는 정암이다.

 

‘소학동자’로 널리 알려진 김굉필에게 학문을 배워 조선 성리학의 종장 김종직의 학통을 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사림파를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했다.

 

조광조의 묘소는 심곡서원 맞은편 산자락 남동쪽 한양 조씨 묘소에 있는데, 정경부인으로 추증된 부인 이씨와 한 봉분에 합장된 단분으로 청렴과 소박함을 강조했던 고인의 삶처럼 수수하게 꾸며져 있다. 봉분 앞에는 묘표와 상석·향로석이 서 있으며, 양옆으로 각 1기의 망주석과 문인석이 놓여 있다. 묘표는 원수방부의 형태를 하고 있으며, 조광조의 주요 관직과 부인 정경부인 이씨가 명기돼 있다. 묘역 입구에 세워진 신도비는 묘표와 같은 형태로 선조 18년(1585)에 건립됐다. 신도비는 노수신이 비문을 짓고, 이산해가 글씨를 썼으며, 김응남이 전서를 썼다.

 

조광조 신도비와 묘표는 이후 조선시대 사대부 묘 비석의 형태적 기준이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충렬서원은 고려 후기 충신이자 ‘동방 성리학의 시조’로 불린 포은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조선 선조 9년(1576) 지방 유림들이 뜻을 모아 정몽주와 조광조를 기리기 위해 처음 지었는데 당시 이름은 ‘죽전서원’이었다. 죽전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됐고, 선조 38년(1605) 정몽주의 묘소 아래에 다시 세워졌다. 이때 조광조의 위패는 심곡서원으로 옮겼고, 광해군 원년(1608) ‘충렬’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이후 선현 배향과 지방 유학 교육을 담당했으며, 정몽주의 손자 정보와 병자호란 때의 충신 이시직의 위패를 추가로 모셨다.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됐으나 1911년 사우를 다시 세우고, 1956년 강당을 복원했으며 1972년 서원 전체를 보완 신축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렬서원은 능원리 마을 뒤쪽 야산 기슭에 남서향으로 자리하고 있으며, 강당을 앞, 사당을 뒤에 둔 ‘전학후묘’ 형식이다. 입구 시설은 일직선으로 배치돼 있으나 강당이 축에서 벗어나 사당과 나란히 보이는 점이 특징이다. 또한 사당과 강당 중심으로 구성된 점은 교육 기능이 축소되고 제향 중심으로 변화한 서원의 특징을 보여준다.

 

충렬서원이 보관하고 있는 유물로는 정몽주의 '단심가'와 홍원주의 '유한집'이 있다.

 

 

정몽주선생묘는 원래 경기도 개성에 속했던 풍덕군에 있었는데, 조선 태종 6년(1406) 현재 위치인 처인구 모현읍으로 천묘했다. 처음에는 고향인 영천에 안장할 예정이었으나, 천묘 행렬 중 명정이 떨어진 곳에 묘를 쓰게 됐고 부인도 함께 합장됐다.

 

현재 묘역에는 상석, 향로석, 문무인석 등 석물과 묘표·신도비가 조성돼 있다. 묘표는 1517년, 신도비는 1699년에 세워졌다. 신도비에는 정몽주의 충절과 학문을 기리는 내용이 담겼다.

 

 

이재선생묘는 처인구 이동읍 천리 산58에 있다.

 

이재(1680~1746) 선생은 조선 숙종~영조 연간의 학자로, 과거 급제 후 관직을 지냈으나 여러 정치적 사건 속에서 출사와 은거를 반복했다.

 

말년에 용인에 머물며 서원 운영과 학문 진흥에 힘썼고, 한천서원을 세워 후진 양성에 힘썼다. '도암집(陶庵集)', '도암과시(陶菴科詩)', '사례편람(四禮便覽)', '주자어류초절(朱子語類抄節)' 등을 저술했다. 특히 ‘사례편람’은 조선 후기 이후 관혼상제의 기준서로 널리 활용됐다.

 

이재 선생의 묘는 원형 봉분으로 조성돼 있으며, 앞에는 상석·혼유석·향로석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과 망주석이 세워져 있다. 봉분 우측 묘비는 1883년 건립됐으며, 글씨는 한석봉의 필체를 집자해 새겼다.

 

[ 경기신문 = 최정용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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