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의 번영과 ‘커피하우스’의 등장
흔히 커피를 서구적인 음료로 생각하기 쉽다. 우아한 조명의 아늑한 커피숍, 그 안에서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 고소한 풍미의 커피잔을 들고 대화하는 모습. 그 풍경은 왠지 세련되고 지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 유럽풍을 떠올리는 것이리라! 하지만 커피는 서양 문화 이전 이슬람의 종교 문화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다.
전편에서 보았듯이 커피는 에티오피아에서 탄생해 홍해를 건너 예멘에 도착했다. 이때 커피는 본격적으로 재배되고 상품화 됐다. 12~13세기 이슬람은 율법에 따라 술을 금지했다. 무슬림들은 커피를 대체제로 삼았고 그 소비량은 가파르게 증가했다. 15세기에는 수피들이 커피나무와 원두를 고향으로 가져갔다. 이로 인해 커피는 이슬람 국가 여기저기로 퍼져 나갔다.
특히 예멘 상인들은 16세기 초, 중동 북쪽의 메카와 카이로, 그리고 다마스쿠스까지 커피를 팔고 커피의 전통 의식을 전수했다. 그때 마카히(مقاهي: 커피마시는 곳)라 불리는 ‘커피하우스’가 등장했다. 이곳에는 상인, 학자, 시인, 정치인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모여 이 고소한 음료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의견을 교환했다.
커피하우스는 따뜻한 음료를 마시는 장소 이상의 의미를 가지게 됐다. 종교 단체와는 달리 사람들이 자유롭게 모여 개인적인 사상과 문화를 교류하는 공공장소로 아랍 문화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갓 내린 커피 향, 백개먼 판 위에서 굴러가는 주사위의 경쾌한 소리, 그리고 정치와 시에 대한 열띤 토론이 어우러졌다. 커피하우스는 정치적 사상, 예술적 표현, 심지어 혁명 운동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비공식적인 토론의 장으로 왕의 정책, 지배 세력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지적‧사회적 장소였던 마카히는 ‘현자들의 학교(madrasa al-‘uqalā’)’라 불렸다.
16세기 중반, 커피는 오스만 제국, 사파비 왕조, 무굴 제국으로 진출했다. 이때 커피는 공공 커피하우스와 왕실에서 널리 소비됐다. 사파비 왕조의 왕실에는 수석 커피 장인의 감독 하에 커피 전용 주방이 운영됐고, 무굴 제국의 궁전에서는 연회와 의식에서 진하고 달콤한 아랍식 커피가 서빙 됐다. 커피하우스는 아랍 세계와 오스만 제국 간의 공공 담론과 문화 교류를 형성하는 공론장 기능을 겸하기도 했다.
◆ 커피의 수난과 오뚜기 인생
만물의 이치가 그러하듯 커피 역시 꽃길만을 걸을 수 없었다. 1511년 순례의 중심지이자 무역의 교차로였던 메카에서 커피가 이슬람 문화와 양립 가능한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해 메카의 총경 카디르 베이(Khadir Bey)는 성스러운 모스크 근처에서 황홀경에 빠진 수피들이 이상한 액체를 주고받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두 명의 페르시아인 의사에게 커피가 실제로 취기를 유발하는지 확인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의사들은 커피를 독성이 있고 ‘와인처럼 취하게 하는 물질’로 규정했다. 이슬람 경전 쿠란은 음주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에 처벌은 가혹했다. 커피콩 자루는 불태워졌고 커피를 마신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매를 맞았다. 몇 년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카이로의 술탄은 자신의 측근 의사와 학자들이 “커피는 독성이 없으며 ‘알라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것을 근거로 이 금지령을 해제했다.
시리아에 커피하우스가 생겨 학자들이 모여 들었을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당국은 사상가들이 주도하는 카페 내부의 저항 세력 형성을 두려워했다. 그곳에서는 아이디어와 사고의 교환이 이루어졌고 때로는 기득권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커피 한 알이 권위에 대한 불신과, 기성 사회 질서나 종교 체제 자체를 위협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커피의 수난은 끝날 줄을 몰랐다. 1523년 카이로의 종교 지도자 압둘라 이브라힘 역시 커피 소비를 금지했다. 커피의 환각 효과 때문만이 아니라 원두를 숯처럼 볶는다는 핑계였다. 숯을 만드는 것 또한 쿠란에서 금기시되는 행위라고 한다. 카이로는 새로운 탄압의 물결에 휩싸였다. 다행히 에스프레소 광인 총경 알 벨레트(El Belet)가 이 물결을 잠재우고 평화롭게 해결했다. 계속되는 박해에도 불구하고 이 음료는 오뚜기처럼 일어나 아랍 세계 전역으로 퍼져 나가면서 더 많은 소비자를 공략했다.
세월이 흘러 권좌에 오른 술레이만 1세는 커피 애호가였다. 1554년, 그는 다마스쿠스 출신의 두 상인이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에 최초의 공공 커피하우스를 열 수 있도록 지원해 줬다. 이 공간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즉각적인 성공을 거뒀다. 학자, 판사, 이슬람 수도승 데르비시와 같은 저명인사들이 찾아 들었다. 시인에서 고위 관리까지 도회지의 지식인과 경제 엘리트도 모여 예술과 정치를 논하고, 글을 쓰고, 게임을 즐겼다. 이 커피하우스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고된 일상을 끝내고 따뜻한 커피 한 잔으로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한 가지 애석한 일은 여성들의 출입을 금지했다는 사실이다.
16세기 말, 튀르키예의 한 시인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커피를 찬양하는 소네트를 지었다. “다마스쿠스, 알레포, 그리고 카이로에서 이 귀한 음료를 만들어내는 달콤한 열매가 차례로 재배되어 궁정에 도착했네.” 쉴레이만 1세의 아들 셀림 2세가 통치하던 당시 오스만 제국에는 커피하우스가 약 600개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중 가장 화려한 카페에서는 야심차고 명망 있는 관리, 판사, 하렘의 고위 관리, 파샤와 궁정 귀족, 그리고 자유분방한 학자들이 병풍 뒤에 숨어 시를 낭송하거나 가수의 노래를 들으며 체스와 백개먼을 두곤 했다. 그들은 사프란, 후추, 심지어 아편을 섞은 커피를 마셨다고 한다.
◆ 아랍의 커피 붐과 또 다른 시련
1630년대 홍해 지역에서 본격적인 커피 해상 무역이 시작됐다. 이는 예멘의 모카 항구를 통해 이루어졌다. 당시 카이로에는 1000개가 넘는 커피하우스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황금기를 맞은 커피는 더 이상 수난 같은 건 찾아올 리 만무하다고 자만했다. 하지만 이건 착각이었다.
1640년 콘스탄티노플에 회오리바람이 불었다. 알코올 중독에 편집증 환자였던 잔혹한 통치자 술탄 무라드 4세는 변장한 채 도시를 돌아다니며 신하들을 감시했다. 어느 날 한 커피하우스에 들른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소리를 들었다. 성난 술탄은 군중이 모이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아편, 담배, 커피를 동시에 금지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나아가 커피를 볶는 행위는 도시에 화재를 일으킬 위험 소지가 있다며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모든 커피숍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이때 커피 애호가와 업주 약 10만 명이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그들은 처형당하거나 가죽 자루에 담겨 흑해 근처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져졌다.
커피의 중동 수난에 종지부를 찍은 건 모카의 압둘라 알 아이다루스(Abdallah El-Aydarous) 시장이었다. 그는 파트와(종교적 칙령)를 발표해 커피가 경건한 마음에 활력을 불어넣음으로써 신앙인의 정신에 도움이 된다고 선언했다. 커피의 본격적인 마케팅 전략이 시작된 것이다. 그 덕에 모카 항은 1750년까지 세계 최고의 커피 수출 무역항으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다.
아랍-이슬람 세계에서 커피가 정상 궤도에 오르기까지 이처럼 많은 수난과 우여곡절을 겪은 것을 커피 애호가들 조차도 잘 모를 것이다. 오늘날 커피는 후추, 석유와 함께 아라비아가 세계에 물려준 3대 검은 황금 중 하나로 사랑받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