②시대의 변화를 감지한 실학자들
◇유형원 선생 묘
실학의 시조로 불리는 유형원 선생의 삶과 학문 정신이 깃든 묘역은 처인구 백암면 석천리 산28-1에 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로 본관은 문화(文化)이고, 호는 반계(磻溪)다. 일찍 아버지 유흠을 여의었는데, 그(유흠)는 ‘유몽인의 역옥’이라는 사건에 연루돼 역적의 누명을 쓰고 감옥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때문에 유형원은 하멜 표류 사건 당시 제주목사를 지낸 외삼촌 이원진한테 글을 배웠다. 5세부터 공부를 시작해 7세에는 '서경(書經)'을 읽었으며, 20세에는 뛰어난 문장과 높은 학문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그는 단 한 번 진사 시험에 합격했을 뿐 과거시험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묘는 부인 풍산심씨(豐山沈氏)와 합장된 단분(單墳, 하나의 봉분) 형태로 1971년에 정비한 곡장(曲墻)을 제외하면 비교적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마련돼 있고 그 좌우에는 문인석 한 쌍이 서 있다. 묘표(墓表)는 봉분의 정면 우측에 세워졌는데 영조 44년(1768)에 제작됐으며, 묘표의 옆면과 뒷면에는 홍계희가 지은 글이 새겨져 있다.
◇허균 선생 묘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해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580년(선조 13)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문학 공부에 전념했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배웠다. 처인구 원삼면 죽양대로 1650번길 71에 있다. 강원도 강릉과는 멀지만 경기도 광주시에 있는 여동생 난설헌묘와는 지근거리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다. 1597년(선조 30)에는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을 했다. 이듬해에 황해도도사(都事)가 됐으나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했다는 탄핵을 받고 부임한 지 6달 만에 파직됐다.
허균은 여러 벼슬을 지냈지만, 결국 그를 역사에 남긴 것은 관직이 아니라 시대를 앞서간 사상과 글이었다.
1618년(광해군 10)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 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했다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해 허균은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했다.
본래 서울 서초동에 양천허씨 묘역이 있었으나 1968년 경부고속도로 개설로 현 위치로 이전했다.
◇유희 선생 묘
처인구 모현면 한국외국어대학교 왕산문화관 뒤편 산에 있다. 조선시대 음운학자, 박물학자이며 관은 진주(晉州). 초명은 경(儆). 자는 계중(戒仲), 호는 서파(西陂) · 방편자(方便子) · 남악(南嶽)이다. 아버지는 현감 유한규(柳漢奎)이며, 어머니는 통덕랑 이창식(李昌植)의 딸로 경사에 능통해 '태교신기(胎敎新記)'를 저술한 전주이씨 사주당(師朱堂)이다. 최근 용인신문이 그녀의 태교철학을 기리고 있다.
유희(1773~1837)는 나면서부터 특출해 13세에 이미 구장산법(九章算法)을 이해하고, 15세에 역리복서(易理卜筮)를 꿰뚫었으며, 18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했다.
그러나 11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아 과거에 나아가지 않았다. 37세에 충청북도 단양으로 옮겨 농사를 짓다가 10년이 지난 48세에 고향인 용인으로 돌아왔으며, 이듬해에 어머니의 상을 당했다.
53세에 둘째 누나의 권유로 과거에 세 번 응시해 생원시에 합격했고, 57세에는 황감제(黃柑製)에서 3등 3석으로 입격하는 데 그쳤다. 학문적 재능은 뛰어났지만 벼슬길과는 인연이 깊지 않았던 셈이다.
그의 유저(遺著)로는 '문통(文通)' 100권이 초고로 전해 왔는데, 진주유씨 문중의 기탁으로 44책 69권이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돼 있다.
그의 학문은 천문·지리·의약·복서·종수(種樹)·농정(農政)·풍수·충어(蟲魚)·조류 등에 두루 통했고, 특히 그 가운데 따로 전하는 '시물명고(詩物名考)', '물명유고(物名類考)' 등이 있다. '언문지(諺文志)'는 국어학사적 사료로서 논의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일찍이 실학자이며 정음학자인 정동유(鄭東愈)를 직접 사사해 당대의 문자음운학에 뛰어난 식견을 갖게 됐다.
30세 전후에 저술한 '언문지'의 원고를 분실하고, 20여 년이 지난 1824년 52세에 다시 저술한 것이 지금에도 전한다. 이 책은 된소리 표기의 병서, ㅸ ㅹ의 설정과 ㅿ ㆁ ㆆ의 설정, 아래아( · )의 음가를 ‘ㅏ, ㅡ’의 간음(間音)으로 본 것, 사이ㅅ 표기 등에 대해 당시로서는 매우 뛰어나고 앞선 견해를 담고 있었다.
신경준(申景濬)과 함께 조선 후기의 대음운학자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들의 문자음운학이란 주로 당시의 한자음을 이상적으로 표기함에 그 목적이 있다.
'언문지'의 유씨교정 초·중·종성 41자모를 보면, 당시 쓰이지 않는 글자가 상당수 채택됐고, 종성에는 ㅅ이 폐기된 내용이었다. 즉, 그것은 당시 한자의 현실음을 교정함에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이것으로 표기되는 글자 수 1만 250개는 사람이 발음할 수 있는 모든 소리로서 초·중·종·전자례의 4부로 구성돼 체계적인 논술이라는 평이다.
또, 정음의 문자 구조가 정교하고 표음문자로서 뛰어나다는 점을 정확히 설명하며 정음에 대한 천대를 한탄한 것은 후대의 학자를 기대하는 뜻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풀이된다.
◇열하일기 초고본
박지원이 바라본 청나라의 풍경을 담고 있다. 수지구 죽전로 152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에 보관돼 후대들을 기다리고 있다.
조선 후기 대문호이자 실학자인 연암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1780년(정조 4)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따라 중국 청나라 건륭제의 칠순 축하 특별 사행의 일원으로 북경을 거쳐 열하에 다녀온 뒤 집필한 연행일기다.
그는 열하일기에서 중국에서 보고 느낀 청나라의 실상과 여행에서 만난 다양한 인간군상들의 모습을 생동감 있는 필력으로 생생하게 기록했다.
석주선기념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연행음청 ▲행계잡록 ▲행계집 ▲잡록 ▲열하일기 ▲황도기략 ▲공작관집 양매시화 ▲열하피서록 ▲정묘중정연암집 등 '열하일기' 초고본은 우리나라 최고의 한학자로 평가받는 연민 이가원 선생(李家源, 1917~2000)이 연암의 현손인 박영범으로부터 입수해 소장하고 있다가 단국대학교에 기증한 것이다.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소장 열하일기 초고본은 연암 박지원의 친필을 포함하고 있고, 원래의 모습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 경기신문 = 최정용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