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유은정의 신작 ‘그림자 아이’는 말하자면 도플갱어의 한국식 확장 버전이다. 영화 내내 언급되는 ‘그림자 아이’라는 잔혹 동화는 이 영화가 만들어 낸 순수 창작물이다. 자신과 똑같이 생긴 인간이 동시대에 존재한다면 이 둘은 정체성이 하나인가, 아니면 분열된 자아가 외연화한 것인가. 같은 세상에 똑같이 생긴 내가 존재하고 그게 문제가 되지 않는 이유는 둘이 만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둘이 서로 마주친다는 것은 두 가지 결론 중 하나이다. 둘 중 하나가 없어지게 되거나 아니면 둘의 정체성이 하나로 합쳐지는 것이다. 두 결론 모두 결과적으로는 분열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게 된다는 얘기이다.
일본의 구로사와 기요시가 만든 ‘도플갱어’(2003)와 캐나다 감독 드니 빌뇌브가 만든 ‘에너미’(2014)가 그런 내용이었다. 유은정의 도플갱어, 아니 그림자 아이는 그 서사를 한국 부모의 이기적 욕망, 오로지 내 아이만 잘살면 된다는 왜곡된 심리에 투영시켰다. 그런 점에서는 진화된 도플갱어 얘기이지만 아직은 숙성되지 않은 느낌이 강하다. 무엇보다 다소 애매한 지점에서 서성이며 결정 증후군 같은 것을 내비친다. 이것은 심리극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의 왜곡된 가족주의를 얘기하는 사회물인가. 아이 둘의 엄마 금옥(임수정)은 죽은 딸 수련(유나)과 똑같이 생긴 아이 재인(유나의 1인 2역)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망상일까, 실제일까. 영화의 답이 좀 더 잔혹했다면 ‘그림자 아이’는, 다소 논란이 있더라도 상업영화로서 완전체가 됐을 것이다. 유은정은 대신, 애매한 예술(영화)적 결말을 선택했다.
‘그림자 아이’의 특징은 ‘부재’에 있다. 금옥의 남편, 아이 둘 곧 수련과 수안(박소이)의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금옥 역시 아버지는 있어도 엄마는 없다. 거실에 있는 액자에는 할아버지와 금옥, 수련, 수안만 있다. 금옥의 이모(오민애)도 혼자인 사람처럼 보인다. 수안이 3년간의 코마에서 깨어나자 병원으로 금옥을 찾아와 “죽은 너의 아버지가 얼마나 기뻐하겠니?”라고 말했을 때, 이 말은 기이하게도 형부와 처제의 관계를 뛰어넘는 느낌을 준다. 금옥의 이모는 엄마 같은 존재로 보인다. 영화 <그림자 아이>에는 맥락상 여러 ‘그림자’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며 결국 금옥의 집안은 결핍과 채움의 문제가 항상성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만큼 다들 고립됐으며, 집안에 내려오는 기이한 괴담에 언제든지 현혹될 수 있는 사람들임을 보여준다. 심지어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그것도 대를 이어 연쇄적으로 죽일 수 있는, 알고 보면 살인 가족인 것처럼 보인다. 만약 거기에 집중했더라면 이 영화 ‘그림자 아이’는 브뤼셀 판타스틱 영화제 같은 장르 영화제에서 주목받았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영화에서 살인극은 대를 이어 승계되거나 사회적 바이러스로 확산하지 않는다.
‘그림자 아이’는 금옥의 아이 수련과 수안이 각각 13살이고 10살일 때 불의의 사고였는지, 아니면 의도된 것이었는지 둘이 동시에 할아버지 저택의 옥상에서 떨어진다는 이야기가 배경이다. 수련이 엄마 금옥에게 유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아이는 자살을 시도한 것으로 보이며 동생인 수안이 말리는 과정에서 동반 추락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수련은 죽었고 수안은 추락의 충격으로 3년간 병원에서 혼수상태로 지내게 된다. 수련은 왜 죽으려 했을까. 이 집안에 내려오는 전래동화에 따르면 집안에 그림자가 있는데 지하 생활을 벗어나 세상에서 몸을 얻어 살고 싶고 그래서 누군가로부터 그 몸을 받아야 하는 상황이 생겼다는 것이다. 수련과 수안 중 누군가 몸을 주지 않으면 둘 다 몸을 뺏기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수련이 동생을 위해 희생한 셈이 된다.
이 집안의 할아버지(박윤희)는 과거에 딸 금옥을 살리기 위해 금옥과 똑같이 생긴 아이를 데려와 살해한 적이 있다. 아마도 그는 그렇게 금이야 옥이야 외동딸인 금옥을 키웠고 그다음엔 금옥의 딸이자 자기 외손녀인 수련을 살리기 위해 아이와 똑같이 생긴 아이를 죽이려고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그걸 눈치챈 수련이 먼저 죽는다. 그래서 이 할아버지는, 결국 수안이 병원에서 깨어나는 것은 물론, 죽은 수련과 꼭 닮은 아이가 나타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래서 그는 죽기 전에 반복적으로 딸 금옥에게 ‘준비하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금고 안에도 자신이 벌인 살인 행위를 기록한 글을 남겼다. 자신이 벌인 살인 행위의 요지는 ‘나는 내 딸을 살리기 위해서 그랬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준비하라’는 말은 딸 금옥 역시 수련과 닮은 그 아이를 죽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아이는 그림자 세상에서 온 그림자 아이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아이들 편에서 볼 때) 할아버지, 이모할머니, 엄마의 행동 동기는 분열된 서사 속에 파편처럼 쪼개져 있다. 그걸 맞추는 데에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해도 그 과정이 지나면 관객은 영화의 개연성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가족 내력으로 존재하는 정신병적 광기의 문제인지, 그걸 뛰어넘는 영화적 메타포인지를 가름하는 건 나중의 일이다. 만약 이 부분을 가족 내 광기의 유전적 병인으로 풀어나갔다면 영화는 어쨌든 흥미진진했을 것이다.
두 개의 좋은 장면이 있고 그건 심지어 보는 사람들을 울컥하게까지 만든다. 엄마 금옥이 수안과 같이 있는 재인을 보고 놀라 아이를 껴안고 흐느끼다가 다시 정신이 돌아오는 장면이다. 그때 금옥이 하는 말은 이것이다. “아, 수련이는 죽었지.” 이 분할된 컷의 시퀀스는 ‘그림자 아이’에서 감정적으로 가장 세련된 촬영분이다. 임수정의 표정 연기가 빛을 발하되 그걸 정중동의 메소드 연기로 성취해 냈다. 아이를 잃은 엄마는 죽은 아이와 눈매만 비슷해도 자신의 아이라고 착각할 것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도 다 할 수 있는 사람이 엄마이겠기에 이 장면은 영화의 분기점이었다. 엄마 금옥은 이후 과연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새 아이를 키울 것인가. 이 아이를 죽일 것인가.
이모가 일하는 병원으로 찾아가 금옥이 하는 말도 인상적이다. 금옥은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담은 채로 뜻하지 않게 ‘무섭다’는 말을 한다. “그 아이가 수안이를 데려갈까 봐 무서워요.” 실제로 수안에게 그림자가 나타난다. 그림자는 수안에게 둘 중 한 명의 몸을 달라고 말한다. 수안은 처음에 그 존재가 언니 수련이라고 생각하나 곧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이는 자각한다. 결국 죽은 수련이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자칫 엉뚱하게 새로 사귄 친구 재인(수련을 닮은 아이의 이름. 이 아이는 중간에 윤서라는 아이의 얼굴도 된다)만 죽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재인의 얼굴이 그때그때 바뀌는 것은 아이의 존재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욕망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기 아이가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하되 이기적으로 바라는 과정에서 원래는 다르게 생겼던 아이 얼굴이 도플갱어처럼 같아지기도 한다, 라는 것이 이 영화의 설명이다. 그건 그럴 수가 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모습이 그렇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이야기의 앞뒤를 꿰어맞춰야 하는 ‘고단함’이 있다. 주제 집중력이 가져오는 몰입감, 공포나 미스터리 스릴러에 필수적인 ‘타격감’이 아무래도 아쉽다. 그럼에도 공간이 주는 결핍과 상실의 아우라는 잘 살린 작품이다. 비교적 규모가 있는 저택에서 가족들은 세상과 단절된 채 살아가는 것처럼 묘사돼 있다. 금옥은 상담사이지만 그녀 자체가 상담이 필요한, 결핍의 모성의 병을 앓는 중이다. 그 심리적 공백을 공간의 여백으로 묘사해 내는 촬영과 미장센이 괜찮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좋은 장면이 있다. 세 개까지는 아니다. 상업적으로, 그리고 비평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더 좋은 장면이 있어야 했다. ‘좋은 장면 세 개’론(論)은 할리우드 감독 하워드 혹스의 얘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