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으로 풀어본 무예]조선시대 군사들의 무예훈련 어떠했을까?

2015-06-21     경기신문

 

조선시대 군사들이 가장 많이 훈련한 종목은 역시 지금의 아침구보와 같은 달리기였다. 특히 임금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모시는 근위대 역할을 하는 금군(禁軍)은 반드시 빠른 발이 필수였다. 유사시에 가장 빠르게 움직이며 VIP를 모셔야 했기에 그들의 달리기 실력은 목숨과도 직결된 문제였다. 그런데 조선시대 달리기 훈련은 요즘처럼 맨 몸으로 달리는 것이 아니라 거의 완전군장을 하고 달리는 것이었다. 사료를 보면 갑옷을 단단히 동여매고 손에는 자신이 사용하는 무기를 들고 전속력으로 300보(약 360m)를 해당시간 안에 주파해야만 최고의 군사로 인정받았다. 이때에는 보통 주통지법(注筒之法)이라고 하여 ‘주통’이라는 일종의 물시계를 놓고 시험을 봤기에 엄격한 시험규정을 따라야만 했다.

조선시대 군사들의 달리기 훈련이 끝나면 바로 이어지는 것이 병기훈련이었다. 그런데 훈련장에서는 의도적으로 군장을 비롯한 기본 장비에 더 무거운 무기를 활용해 군사들의 힘을 키우는 것에 집중하였다. 이는 조선시대의 군사훈련의 기본이 ‘사람의 혈기(血氣)를 왕성하게 하는 것’을 기본으로 했기 때문이다. 당시 사료를 보면 ‘군사들의 몸은 쓰면 쓸수록 견고해지고 쓰지 않으면 약해지는 것’이라는 표어를 바탕으로 힘줄과 뼈를 수고롭게 해서 몸을 고달프게 하는 것을 최고의 목표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반적인 가죽갑옷을 입는 군사들은 갑옷 안에 돌덩어리를 천으로 싸서 묶거나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칼의 무게의 두 배가 넘는 크고 무거운 목검을 이용해 훈련하였다. 또한 다양한 모양의 진법훈련을 거듭할 때에는 모래주머니를 발목에 묶어 훈련의 강도를 높이곤 하였다. 그래야만 실제 전투가 발생했을 때 더 가벼운 갑옷과 무기를 사용해서 전력으로 싸울 경우 적을 충분히 꺾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군사들이 입었던 갑옷은 각 병과마다 특징을 살려 입었다. 예를 들면, 보병은 적에게 온 몸이 노출되기에 무릎아래까지 내려가는 긴 원피스형 갑옷을 입고, 기병은 말위에 올라타 상체를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상반신과 하반신을 분리하는 형태 중 짧은 갑옷을 입었다. 그리고 활을 쏘는 궁수는 활을 크게 당겨야 하기 때문에 갑옷 자체가 넉넉하고 풍성한 것을 입었으며, 긴 창을 쓰는 창수는 옷에 걸리지 않도록 몸에 꼭 맞는 갑옷을 입었다. 그리고 갑옷의 특성에 따라 가벼운 가죽 갑옷은 주로 보병들이 입었는데, 주야로 이어지며 오랜 시간에 걸쳐 성을 공격하는 공성전 훈련 때에는 무거운 철갑옷으로 바꿔 입혀 그 무게를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훈련이 되도록 진행하였다.

이렇게 달리기 훈련을 기본으로 하고 갑주를 입고 진법 훈련을 마치면 개인들이 서로 무기를 들고 겨루는 교전훈련이 이어졌다. 이때에는 살상력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무기에 가죽을두텁게 씌워 훈련에 사용하였다. 그래서 짧은 칼을 사용하는 도검수(刀劍手)들은 나무로 만든 목검에 가죽을 씌운 피검(皮劍)을 이용하여 교전훈련을 진행하였다. 또한 긴 창을 사용하는 창수(槍手)들 역시 창날 끝부분에 가죽을 씌운 피두창(皮頭槍)을 사용하여 연속적으로 찌르는 교전훈련을 진행하였다. 이때에는 보통 가죽으로 씌운 무기의 표면에 붉은 색의 물감을 묻혀 상대의 몸에 얼마나 많은 수의 물감이 묻었는지를 확인하여 훈련의 성적을 구분하였다.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궁기병의 경우 역시 화살촉을 완전히 제거하고 끝부분을 솜과 천으로 마무리하여 만든 무촉전(無鏃箭)에 붉은 물감을 묻혀 교전훈련에 사용하였다.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군사들이 사용하는 무기들도 점점 첨단장비로 변화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전쟁을 수행하는 군사들의 기본 역시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있어야만 제대로 된 전투를 수행할 수 있다. 결정적인 순간에 지력과 체력을 겸비하지 않는다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지나치게 문명화되어 가는 현대사회에 체력과 무예가 요구되는 이유 역시 일맥상통 할 것이다. 그것이 전통시대든 오늘이든 군사들이 신체단련을 하는 본질적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