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들은 삼등신이다. 머리와 몸과 다리의 비율이 그렇다. 같은 길이는 불편하다. 앉고 서고 걷는 것이 모험이다. 모험에는 좌절이 함께여서 아기들은 넘어지는 것부터 배운다.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은 스스로의 터득이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나 많은 실패를 넘어 아기들은 세상으로 나아간다. 뒤뚱거리며 한걸음씩 위치를 옮긴다. 옮길 때, 아기들이 나아가는 방향은 일직선이다. 주저와 망설임은 아기들의 것이 아니다. 아기들의 걸음걸음은 정확히 순수와 일치한다. 감추거나 계산하지 않는다. 꽃밭으로만 향하지도 않는다. 송곳니를 드러내는 뱀을 향해서도 아기들은 손을 뻗는다. 뻗는 손을 따라서, 머리와 몸과 다리가 뒤뚱거린다. 어른들은 칠등신이다. 지위와 재산과 나이의 비율이 그렇다. 비율이 길어질수록 사는 게 고단하다. 앉고 서고 걷는 것이 죄다 돈이다. 돈은 성공의 다른 말이라서 어른들은 실패하지 않는 법을 배운다. 어른들의 배움은, 그러니까 돈을 버는 방법에는 끝도 없고 한도 없다. 훔치거나 속이거나 빼앗아서 돈을 버는 어른도 있지만, 대부분은 키우거나 팔거나 바꾸거나 만들어서 돈을 번다. 간혹, 글을 써서 돈을 벌겠다는 나 같은 어른도 있는데 ‘등신’ 소리 듣기 십
일초라는 시간은 짧다. 틱, 하면 사라지고 틱, 하면 나타난다. 틱, 하는 순간 소멸해버릴 작은 단위를 왜 사람은 시간의 범주에 포함시켰을까? 하찮아 보이지만, 일초가 지닌 의미는 흥미롭다. 일초는, 야구경기에서 투수 손을 떠난 야구공이 배트를 맞고 다시 투수에게 날아가는 시간이다. 일초는, 재채기를 할 때 튀어나온 침이 백 미터 날아가는 시간이고, 총알이 구백 미터 떨어진 표적을 관통하는 시간이다. 뿐만 아니다. 달팽이가 일 센티미터 전진하고, 두꺼비 혀가 먹잇감을 낚아채고, 벌새가 육십 번 날개를 퍼덕이는 것이 모두 일초에 이루어진다. 범위를 지구촌 전체로 넓히면 일초가 지닌 의미는 더욱 흥미롭다. 일초마다, 세 번 결혼식이 열리고, 네 명이 태어나고, 두 명이 죽는다. 일초 동안, 지구는 태양으로부터 사백팔십육억 킬로와트의 에너지를 받고, 사백이십 톤의 비가 쏟아지고, 일만 천 리터의 바닷물이 증발한다. 두 대의 승용차와 네 대의 텔레비전이 생산되고, 청바지는 칠십 벌, 신발은 백 켤레가 팔린다. 그것이 일초다. 오천칠백 리터의 탄산음료와 오십일 톤의 시멘트가 소비되고, 스물두 명의 여행자와 이십만 건의 문자메시지가 국경을 넘나든다. 틱, 하고 사라져버
누구나 별을 꿈꿉니다. 별 하나, 가슴에 보듬고 삽니다. 당신과 나도 그렇습니다. 보듬은 별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사랑이든 성공이든 명예든 온전히 자유입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릅니다. 제각각 다른 별을 소망할 수 있는 자유 말입니다. 소망과 자유는 낮과 밤 같아서, 같은 하늘에 머무를 수 없습니다. 없어서, 꿈꾸는 별은 현실이 되지 못하고 표류하기 일쑵니다. 당신과 나의 별 역시 그럴 것입니다. 돈이 뜰수록 별이 지는 세상입니다. 지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에게 소망은 다른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지는 별을 가슴에 보듬으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신이라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머무는 별무리는 늘 촉촉합니다. 축축함을 닮은 말이지만 녹물처럼 얼룩지진 않습니다. 다가가기에도 아찔한 별이라서 젖을 겨를이 없습니다. 손 잡아주지 않아도 배회할 골목길이 당신과 나에겐 없습니다. 누구나 별을 소망합니다. 별 하나, 숨결 가득 머금고 삽니다. 당신과 나도 그렇습니다. 머금은 별빛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바름이든 옳음이든 평등이든 온전히 자유입니다. 어쩌면 그래서일지도 모릅니다. 제각각 다른 별을 꿈꿀 수 있는 세상 말입니다. 꿈과 세
보여주지 않아도 압니다. 얼굴은 필요 없습니다. 뒷모습만 보아도 분명할 때, 확인이라는 절차는 생략해도 좋습니다. 그럼에도 방송에서는, ‘이십대로 추정되는 남성과 좀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여성’이라고 표현할 것입니다. 그건 그들의 방식입니다. 나는 그냥 ‘엄마와 아들’이라고 부를 겁니다. 그리 불러도 무방할 만큼 두 사람의 뒷모습은 닮은꼴입니다. 피는 못 속인다고 했습니다. 쾌활한 팔 동작과 명랑한 발놀림만 봐도 틀림없습니다. 저런 생김새와 걸음걸이는 물려줌과 물려받음 아니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손과 발을 교차하며 걸어갈 때, 고개 젖히며 웃는 머리 각도와 어깨 들썩이는 모양새까지 영락없습니다. 보여주지 않아도 압니다. 설명은 필요 없습니다. 까르르 웃을 때, 서로를 향해 쏟아지는 봄 햇살 같은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언론에서는, ‘발달장애 아들을 보살피는 어머니’라고 보도할 것입니다. 그건 그들의 말투입니다. 나는 그냥 ‘엄마와 아들’이라고 부를 겁니다. 그리 불러도 좋을 만큼 두 사람의 웃음은 온전합니다. 억지웃음은 들키기 마련입니다. 특수학교 통학버스에 오르는 아들의 웃음에는 꾸밈이 없습니다. 아들을 배웅하는 엄마와, 차창 안에서 손 흔
‘우리’는 모호합니다. 꼼꼼히 따져볼수록 복잡합니다. ‘나’와 ‘너’처럼 절대적일 수 없어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입니다. 수학교과서에 등장하는 집합 같다고나 할까요. 교집합이거나 합집합일 수 있는, 그러니까 ‘A∩B’ 혹은 ‘A∪B’인 것이 ‘우리’입니다. 겹쳐진 두 개의 동그라미에 표시된 빗금일 수도 있고, 중괄호 속에 나열된 원소일 수도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숫자나 기호로 표시된 ‘우리’는 생명이 없어서 어떻게 묶여도 상처받지 않습니다. 정작 쓰리고 아린 ‘우리’는 사람 사는 영역에 있습니다. SKY이든 강남이든 연봉이든 무엇이든, 끼리끼리 교집합으로 묶인 ‘우리’ 속에서 차별과 박탈의 상처가 자라납니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통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을 호령하던 ‘우리’는 무소불위(無所不爲)의 패거리였습니다. 하늘의 별을 따서 계급장에 붙일 수도 있는 그들에게 불가능이란 없었습니다. 남진이 부른 노래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복집을’ 짓는 사건도 저질렀습니다. 시절은 바뀌었지만 세상을 주무르는 ‘우리’는 여전합니다. 여전한 힘과 권력의 ‘우리’는 여의도와 SKY에만 있지 않습니다. 눈에 도
새해 첫날 들었던 생각이다.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굳이 안다면, 그 어떤 것도 모른다는 사실뿐이다. ‘나는’과 ‘모른다’ 사이의 괄호에 어떤 단어를 적어 넣어도 무방하다. 나는 (구름을) 모른다. 나는 (바람을) 모른다. 나는 (햇살을) 모른다. 구름도 바람도 햇살도 모르는 내가 사람과 도시와 세상을 알 턱이 없다. 사람은 고사하고, 사람이 만들어내는 온갖 것들에 대해. 이를테면 미움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바름이라든지 그름 같은 것을 모른다.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안다고 끄덕였던 적도 있었는데 부끄러운 고갯짓이었다. 교과서 몇 권 읽었다고 안다고 믿는 건 착각이다. 앎이란, 그렇게 하자는 인간의 약속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니까. 모른다. 나는 알지 못한다. 하물며 새가 왜 우는지조차 나는 모른다. 우는지, 웃는지, 부르는지, 화내는지, 노래하는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는지 알지 못한다. 내게는 새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특별한 눈이 없어서 미루어 짐작할 수도 없다. 없으니 모를 수밖에. 새해 첫날부터 모르는 것투성이다. 모른다는 고백을 인간이 정한 약속으로, 그러니까 말 혹은 언어라는 기호로 나열하고 있는 나는 얼마나 궁색한가. 궁색을 넘어 무용한가.
송곳니로 물어뜯었다. 아니, 송곳니를 깊숙이 박고 나머지 이빨로 물어뜯었다는 게 적확한 표현이다. 물어뜯는 이빨의 무작스러움은 악다문 턱뼈와 흔들어대는 모가지 근육을 통해 그대로 전달되었다. 으르렁거릴 때마다 까뒤집어진 잇몸 사이로 침이 번들거렸다. 번들거리는 침에서 개 사료 냄새가 났다. 비릿한 동물성 사료 냄새에 비위가 뒤틀렸다. 도사견과 세퍼드의 잡종쯤일까. 대가리를 흔들며 물어뜯을 때마다 덩치 큰 개의 살집이 덩달아 출렁거렸다. 개는 두 개의 눈을 송곳니처럼 내 얼굴에 박고 놓아주지 않았다. 타깃이 된 나의 얼굴이 개의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쳤다.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땅끝 마을에는 드문 눈이다. 삼년 만에 내리는 함박눈이라고 했다. 첫눈치고는 소복하여서 해남 천지가 함박꽃이다. 눈꽃을 만끽하려 나섰다가 개를 만났다. 딸기농사를 하는 농장 앞이었는데, 논 가운데 하우스 몇 동을 지어놓고 있었다. 개는 열린 문틈으로 곧장 걸어 나왔다. 목줄을 하지 않은 개였다. 송곳니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지만 주인은 웃으며 내게 말했다. “우리 사랑이는 사람 안 물어요.” 나는 어깨에 메고 있던 백팩을 내밀며 방어자세를 취했다. 개 주인이 다시 웃으며 말했다. “안 문
빼돌린 정보로 부정부패를 일삼는 무리들은 탈세에도 능하다.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고액·상습체납자는 56,085명으로 총 체납액수는 51조1천억 원에 달한다. 2019년을 기준한 자료인 만큼, 상습체납자의 실제 규모와 체납액은 훨씬 많을 것이다. 지난 3월, 국세청은 암호화폐에 재산을 은닉한 상습 고액체납자 2,416명을 적발하고 체납세금 366억 원을 징수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고의로 세금을 체납한 사람들에 대해 국세청이 강제 징수한 것일 뿐, 들키지 않고 자행되는 불법탈세는 우리사회 곳곳에서 여전하다. 페이퍼컴퍼니, 해외재산은닉, 역외탈세, 편법증여, 차명계좌, 다운계약서 등 수법 또한 다양한데, 최근에는 죽은 사람과 거래한 것처럼 속여 돈을 빼돌리는 신종수법까지 등장하였다. 대다수 국민들의 세금은 근로소득을 통해 원천징수한다. 그런 만큼 국민들에게 탈세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이다. 그래서일까. 끼리끼리 뭉쳐 부정부패를 일삼고 탈세를 조장하는 무리들은 국민을 깔보고 무시한다. 입으로는 섬긴다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짐승’(개·돼지)이라고 비웃는다. 팍팍한 살림살이에도 끽소리 못하고 세금을 내는 국민들이 그들의 눈에는 ‘호구’로 보일지 모른다. 묻고 싶어지는
첫눈(小雪)은 청첩장이에요. 겨울이 보내온 언약이기도 하고요. 가을빛에 시든 것들의 머리카락을 하얗게 물들이겠다는 다짐이라고나 할까요. 언약이든 다짐이든 속내를 들춰 보면 거절할 수 없음을 알게 되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도 그러한데 계절과 계절이 주고받은 약속을 어찌 거부할 수 있겠어요. 생각해 보세요. 간다고 해서 붙들 수 있는 가을이 어디 있으며, 온다고 해서 등 돌릴 수 있는 겨울이 어디 있겠어요. 사람에게도 세상에게도 시절에게도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은 있어요. 이를테면 첫눈이 내린다는 소설(小雪)도 그런 셈이지요. 지어낸 이야기의 그 소설(小說)이 아니니까 흘려듣진 마세요. 좋든 싫든 첫눈은 오고야 마는 거니까요. 첫눈(小雪)은 밤 여덟 시에요.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라면, 밤 여덟 시는 스무 번째 시간에 속해요. 무슨 소리냐고요? 일 년을 스물여섯 개의 절기로 나누었을 때, 스무 번째 절기가 소설(小雪)이라고 하면 고개가 끄덕여지나요? 그리 보면 밤과 겨울은 닮았어요. 어둡고 춥고 쓸쓸해요. 날짜로 환산해 보니까 11월 22일이더군요. 절기상 소설(小雪)에 해당하는 날짜 말이에요. 그래서일까요. 지나온 11월 22일을 돌이켜 보면 유독 찬바람이
파란 하늘이다. 물걸레로 닦아낸 칠판 같다. 티끌 하나 보이지 않아서, 마루에서 마당으로 내려서지 못한다. 슬쩍 한 칸 내려서서, 하늘과 땅이 맞닿은 곳을 향해 걸어가지 못한다. 파란 하늘이라서. 다 벗겨지고 속살만 남은 가을날이라서. 없어서. 보이지 않아서. 나는 감히 어쩌지 못하고 명랑한 하루 앞에 그림자로 선다. 처남이 죽었다. 정부가 발표한 코로나 사망자 숫자에 처남의 죽음이 합쳐진다. 화장터 소각로에는 한 시간 간격으로 새로운 주검이 눕는다. 주검이 바뀔 때마다 살아남은 자들이 운다. 울음의 사연은 소각로마다 다르지만, 울음이 향하는 방향은 시뻘건 불꽃 너머로 같다. 아무리 울어도 불꽃 너머는 꿈쩍없다. 할아버지가 운다. 처남의 장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고속버스 안이다. ‘인수’일까 ‘연수’일까. 딸의 이름을 부르며 우는 할아버지의 슬픔이 버스를 삼킨다. 자식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길을 나선 늙은 아비의 울음 앞에 모두가 침묵한다. 눈시울을 훔치는 승객도 몇 있다. 견디기 힘든 슬픔과의 동행이다. 죽음 다음은 늘 살아남은 자들의 몫이다. 남은 자들은 묻고 덮고 잊는 일을 견디며 산다. 살아내는 일처럼 오랜 견딤이 또 어디 있을까. 망각이란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