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장터에서 장사꾼이 장사를 시작했다. 이 창으로 뚫지 못할 방패가 없다. 잠시 후에 둥근 방패를 들고 나왔다. 이 방패로 막지 못할 무기가 없다. 창이든 칼이든 다 막아내는 튼튼한 방패라는 것이다. 그러자 구경꾼 중 한 명이 그럼 세상에 뚫지 못할 것이 없는 이 창으로 세상에서 막지 못할, 도저히 뚫을 수 없는 방패와 겨뤄보면 어떠하겠는가 제안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듣고 보니 말하고 보니 참으로 모순된 일이기 때문이다. 矛盾(모순)이다. 矛(창모)盾(방패순). 어처구니가 없다. 1811년 홍경래의 난 때 조부 김익순(金益淳)이 홍경래에게 항복하였기 때문에 연좌제의 의해 집안이 망했다. 당시 6세였던 김익순의 손자 김병연은 황해도 곡산으로 피신하여 숨어 지냈다. 후에 사면을 받고 과거에 응시하여 조부의 행위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답을 적어 급제하였다. 그러나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라는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 벼슬을 버리고 20세 무렵부터 방랑생활을 시작하였고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 생각하고 항상 큰 삿갓을 쓰고 다녀 김삿갓이라는 별명이 생겼다. 공무원이 일을 열심히 해야할 부서가 있고 적절하게 근무할 부서가 있는 것 같다. 기획부서, 예산부서,
강원도 속초 인근에서부터 한눈에 보이는 울산바위는 거대한 바윗덩이다. 조물주가 천하에 으뜸가는 경승을 하나 만들고 싶어 온 산의 봉우리들을 금강산으로 불러들여 심사했다고 한다. 둘레가 4km쯤 되는 울산바위는 울산을 출발하여 금강산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덩치가 커서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금강산의 일원이 되지 못하였다. 울산바위는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것도 쉽지 않다 생각하고 지금의 자리에 눌러 앉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설악산을 방문한 울산부사가 이 울산바위의 전설을 듣고 신흥사를 찾아가 주지스님에게 “울산바위가 너희가 관장하는 사찰림에 와 있는데 땅세를 물지 않으니 괘씸하기 그지없다. 땅세를 내놓아라” 하였다. 그래서 매년 세를 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해에 신흥사의 동자승이 나섰다. “이제 세금을 내지 못하겠으니 이 바위를 도로 울산 땅으로 가져가시오.” 이에 울산부사가 “이 바위를 재로 꼰 새끼로 묶어주면 가져가겠다”라고 하였다. 재로 새끼를 꼴 수 없으니 계속해서 산세를 받겠다는 생각이었다. 동자승이 사람들을 모아서 청초호와 영랑호 사이 지금의 속초 시가지가 자리한 땅에 많이 자라던 풀로 새끼를 꼬아 울산바위를 동여맨 뒤에 그 새끼를 불로 태워 꼰
초등학교때 교장선생님은 두 분으로 기억한다. 두 번째 교장선생님은 6학년 때 지병으로 별세하셨다. 미술시간에 교장선생님 영정사진을 그린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합격을 축하하는 5원짜리 엽서를 보내주신 담임 황인각 선생님은 당시 나이가 25세였는데, 학생들에게 은사님을 추억하는 기회를 주었다. 교사, 교수를 거쳐 교육청 기자로 활동하고 회갑을 넘긴 나이에 경기도청 기자로 뛰고 있는 영원한 현역인 친구는 초·중·고 담임·교감·교장선생님 이름과 얼굴을 모두 외우는 기억력 천재다. 친구처럼 선생님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여 늘 송구하다. 수년 전, 상가(喪家)의 옆 테이블에서 현직 교장선생님이 모 초등학교에서 선친과 자신이 대를 이어 근무함을 자랑했다. 6학년 때 영정사진을 그린 교장선생님의 아드님이다. 중학교 1학년때 선친(先親)을 떠나보냈다는데, 나보다 1년 연상이었던 것이다. 교직자로서 가업을 이어온 것도 존경할 일이고 아버지의 학교에서 대를 이어 벽지학교 교장으로 근무하는 효심도 존경스럽다. 우리는 TV에서 벼루, 한지, 자개장, 옹기, 유기 등 3대 이상 전통을 이어가는 장인(匠人) 이야기를 보곤한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후계자가 없음을 걱정한다. 사
1960년대 농촌에서는 ‘하다 못해 면서기라도 하라'는 말이 유행했다. 붓글씨는 아니어도 펜글씨를 잘 쓰면 면서기로 일하는 시절이었다. 지역의 유지가 면장을 하던 시절에 면장에게 부탁을 하면 글씨를 잘 쓰는가에 큰 비중을 두어 임시로 뽑아 쓰다가 잘 적응하면 이른바 정직원으로 채용했다. 당시 글씨가 중요한 이유는 타자기 보급전이었고 복사기는 물론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행정을 펜글씨로 쓰고 호적등본, 주민등록 등본과 초본에는 ‘기재생략’이라는 고무도장이 가득했다. 또한 당시의 호적부에는 할아버지부터 아들, 며느리, 손자손녀가 바글바글했다. 아들이 분가를 신청해야 호적에 분리되었던 시절이다. 호적등본상 가족이 15명이나 되니 손자손녀 취업서류를 구비하려면 3일전에 예약을 해야 했다. 신청을 받은 호적주임이 토요일, 일요일 여유시간에 따로 호적등본을 필사했다. 먹지를 대고 2부를 더 복제했다. 모든 일을 글씨로 하니 글씨를 잘 쓰면 보다 나은 보직으로 진급했다. 군청 시청과 도청의 공직에서 필체는 중요한 업무능력이었다. 인사계, 기획계, 예산계에는 명필 직원들이 발탁되고 수직승진을 거듭하여 간부가 되고 1992년 지방자치 이전까지 시장군수에 발탁 되었다. 그리고
미국 제39대 대통령 지미카터(Jimmy Carter)는 세계인물평전에서 “도덕적 신념을 현실 정치에 구현하고자 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는 재임기간 동안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라는 여론의 악평을 들었다. 국민들은 차라리 당선 직후에 곧바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면 더 멋진 대통령으로 기억될 것이라 조크했다. 그는 퇴임직후 설립한 카터재단(Carter Center)을 통해 국제적 분쟁의 조정과 인권 신장에 혁혁한 공을 세움으로써 2002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수상소감에서 그는 “우리는 고통의 경감을 선택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평화를 위한 협력을 선택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지미카터 대통령이 재임한 1977~1981년은 한반도의 남북긴장, 오일쇼크 등 쉽지 않은 세계사적 상황이 있었다. 그가 1979년 6월에 우리나라에 왔다. 이제보니 공직에 입문한 초기에 지미카터 대통령을 TV에서 보았다. 당시 언론에서는 미국의 땅콩장사 대통령이 왔다고 했다. 이제 전직 대통령 카터는 ‘사랑의 집짓기 봉사활동’의 상징이 되었다. Habitat for humanity를 시작하고 현재에도 세계를 돌며 활동하고 있다. 임창열 도지사가 2000년경 외자유치
삶의 터전은 강과 산, 그리고 그 사이에 형성된 들판이다.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고 계곡 아래에서 바라보면 하늘은 높다. 큰 강과 높은 산자락에 자리한 삶의 터전에서 자란 아이 중에 큰 인물이 많다고 한다. 호연지기라 한다. 섬마을이 좁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느 소년은 그곳에서 드넓은 대양을 발견했다. 자고 깨면 만나는 드넓은 들판을 보면서 성장한 소년은 시인이 되고 길고 푸른 강가를 거닐던 아이는 작가가 된다. 어쩌다가 방문한 고향마을에서 자신의 유년시절을 추억하다 보면 참으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나 큰 도시까지 나왔구나 생각을 하다가 한반도와 아시아, 태평양과 대서양을 그려보다가 일순간 태양계로 달려가는 의식의 흐름을 발견하고 깜짝 놀라서 돌아오곤 한다. 우리의 생각이 지구를 떠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일 수 있지만 가끔은 우주적 상상을 해 볼 필요가 있겠다. 특히 공직자라면 가끔은 혼자서 큰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지구보다 큰 ‘화성시’를 생각하는 것처럼. 그리고 지금 고민하고 있는 일이 정말로 갈등해야 하는 사안인가에 대한 냉철한 판단을 하자는 말이다. 근시안적인 행정적 판단이라는 언론의 비판을 받게 되는 이유는 가장 가까운 사례에만 집착하기 때
귀하는 특별한 사명감과 봉사정신으로 1998년 8월 집중호우로 많은 수해를 입은 동 주민의 손과 발이 되어 수해복구 작업에 많은 힘을 경주하여 조속한 시일에 복구되어 생업에 종사토록 한 공로에 보답고져 동 주민들의 정성을 모이 본 패를 드립니다. 1998년 10월 10일 동두천시 생연4동 11통 주민 일동. 이 패를 시청 월례조회에서 전하시겠다 하시므로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동장근무를 마치고 수원으로 복귀하면서 소중하게 품에 간직하였다. 1998년 동두천 수해는 아주 심했다. 당시에 동사무소 공무원들이 모두 나서고 시청에서 지원나온 공무원들의 힘을 보태서 이재민을 구호하고 피해를 복구하였다. 중간에 공무원들이 힘들다 할때마다 참고 견디자 말했다. 22년이 지난 지금도 당시의 어르신들과 1년에 두세번 통화를 하고 한두번은 상호 방문을 한다. 지난해 장인의 빈소에도 여러분이 오셨고 당시의 공무원중에도 간부가 되어 먼 길을 달려왔다. 발령이라는 것은 인사부서의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서 이러저리 결정되는 것이지만 그 발령장 이후의 상황은 참으로 긴긴 이야기가 된다. 그래서 운명적인 일이라고도 한다. 이후에 더 큰 인연으로 만나게 된 것도 이미 그런 운명이 있
초등학교 4학년부터 도시락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 1969년에 국민학교 5학년, 지금의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가져간 도시락을 먹을 때 모든 학생들이 뚜껑을 열자마자 반찬을 가렸다. 시 시골에서는 그릇이 풍족하지 않았고 도시락도 요즘처럼 플라스틱이 보급되지 않아서 스테인레스 도시락이 나오기 이전까지 ‘누렁이 도시락’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엄마나 가족이 도시락을 준비해 줬지만, 더러는 초등학생이 반찬을 담아왔다. 그래서 기대감은 없었다. 오늘 반찬이 무엇인지 잘 안다. 이같은 모습은 요즘 아이들이 아파트 키 번호를 열 때 손으로 가리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CCTV에 번호가 보인다 해서 가리고 누군가가 숨어서 비밀번호를 볼까봐서 그리 한단다. 세월이 흘러 학생들의 도시락에 소시지와 햄과 계란이 등장했다. 계란물에 담가서 익힌 소시지는 최고의 반찬이고 도시락밥 한가운데를 채운 계란도 부의 상징이었다. 그래서인가 이쯤에서부터 아이들은 도시락 반찬을 가리지 않았다. 부잣집 아들딸들은 자랑이라도 하듯 오픈으로 도시락을 먹었다. 학교급식이 실시되면서 부모님들의 도시락 걱정을 덜었다. 하지만 저녁은 달랐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정부와 지자체에서 저녁을 급식하는 경우에 집 근
황산성 환경부장관 때 쓰레기수거 일원화, 분리수거, 종량제 등 환경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의 기초가 시작됐다. 그리고 1995년1월부터 종량제가 시행됐다. 풀네임은 ‘쓰레기 수수료 종량제’다. 초기나 지금이나 분리배출이 공무원시험보다 어렵다고 한다. 집에서 재활용 쓰레기를 아파트 마당까지 가져오는 것만으로도 도리를 다한 듯 느끼는 국민들에게 플라스틱, 패트병, 비닐 등을 분류하고 다시 색상별로 용기에 담으라하니 어지럽다. 그래서 분리수거 날에는 오히려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논산훈련소 교관이 된다. 아빠들이 눈치를 보는 분리수거의 날이다. 종량제 효과는 크다. 시행 당시 통계로도 1일 1인당 1.33에서 1.03kg으로 300g이 줄었다. 사실 종량제 이전까지는 아파트의 편리함을 마음껏 누렸다. 아파트 15층 하나의 배출구에 종이, 신문, 박스, 비닐 등을 버린 후에 젖은 음식물 쓰레기를 투기했다. 처리 비용도 더 들고 재활용 품질은 떨어졌을 것이다. 시행 25년을 맞이한 2020년의 우리 삶의 모습은 어떤가. 매주 정해진 날에 종이박스와 플라스틱, 비닐 봉투를 들고 관리소에서 정한 저녁 5시에 맞춰 눈치 보며 나간다. 입주민도 개인 일정이 다양할 것이니 분리수거
면사무소에 다니는 형이 늘 자랑스러웠던 중학생 동생이 친구들과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페인트통을 들고 지나가는 공무원 3인과 조우(遭遇)했다. 검정과 흰색의 페인트가 묻은 옷을 입고 걸어가는 형을 발견한 동생은 끝내 외면하고 말았다. 정장을 입었거나 최소 점퍼에 새마을 모자를 쓴 형이라면 따라가서 인사하고 친구들에게 자랑했을 것이다. 집에 도착한 동생은 아버지에게 하소연했다. “형은 면사무소 7급 공무원 다닌다면서, 페인트칠 작업을 하네요.” 저녁에 집에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가 이 사실을 말하자 설명할 길이 없다. 당시에는 산 정상에 헬기장과 관정(管井), 양수기는 중앙의 높은 기관에서 관리하고 평가를 했다. 요즘에는 업체에 용역계약을 하면 될 일이지만 당시에는 시골 산 정상까지 올라갈 용역사가 없으므로 공무원 서너명이 페인트, 붓 등 자재를 사들고 산 정상에 올라가 낙엽을 걷어내고 흰색으로 H자를 새겼다. 하늘을 나는 조종사가 헬기의 다리를 내릴 자리가 잘 보이도록 표시를 하는 것이다. 이즈음에 공무원들은 남의 집 농사를 잘도 지었다. 특히 동네 어귀의 논은 가을 논갈이, 봄날의 모내기, 피살이, 농약뿌리기와 벼베기까지 모두 공무원들이 자발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