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과 한강 정구를 배향한 서원이다. 한훤당 김굉필은 단종2년(1454)에 태어나 연산군 10년(1504)에 51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조선시대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김굉필 선생이 태어난 시기와 생을 마감한 시기를 봤을 때 직감적으로 그리 평탄한 삶은 아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굉필 선생이 태어난 해인 단종2년은 수양대군이 모든 권력을 장악한 이듬해이다. 그 뒤 단종이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난 것은 김굉필 선생이 1세 때이다. 즉 김굉필 선생은 왕실이 임금의 자리를 놓고 권력다툼이 무척이나 거세었던 혼란한 틈바구니에서 태어난 것이다. 또한 김굉필 선생이 생을 마감한 시기는 연산군 10년으로 갑자사화가 있었던 해이다. 김굉필 선생은 27세의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른다. 30세가 되어서야 후진양성에 힘쓰게 되고, 41세가 되어서야 관직에 나아갔다. 그리고 불과 4년만인 45세에 조선 최초의 사화로 알려진 무오사화의 회오리 속에 평안도 희천으로 유배를 가게 된다. 그 뒤로 유배지가 전라도 순천으로 옮겨지게 되고, 51세의 나이로 갑자사화로 인해 생을 마감하였다. 김굉필 선생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대구 달성 도동서원으로의 여행을 이어가보자. 보물 담장과 환주문을 지나면 도동서원의 강당 중정당이다. 중정당으로 들어서면 중정당 마당 한가운데 박석이 깔린 좁은 길이 나 있다. 그 길을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 길 끝자락에서 거북이를 만난다. 거북이는 두 눈을 부릅뜨고 길을 향해 앞만 바라본다. 이 길은 유생들이 함부로 지나다니는 못했을 길이다. 어쩌면 거북이는 이를 지키느라 두 눈을 부릅뜨고 엄숙하게 지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정당의 기단은 아주 독특한 생김새를 하고 있다. 보통 건물의 기단은 사각형의 장대석들을 쌓아 올린 모습으로 네모반듯한 모습을 띤다. 하지만 중정당의 기단은 모양과 색깔이 모두 제각각이다. 흡사 테트리스 게임을 한 듯한 느낌이다. 어떻게 기단의 돌들이 모두 각양각색일까? 이유는 유생들에게 있다. 도동서원에 기거할 유생들이 각자 고향에서 돌을 가져와서 서원을 건축하는데 뜻을 보탠 것이다. 즉 중정당은 유생들의 마음을 디딤돌 삼아 세워진 강학공간인 셈이다. 중정당의 기단에는 눈에 띄는 장식들이 있다. 첫째는 다람쥐모양의 세호이다. 세호는 조선의 왕릉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문양이다. 왕릉의 세호와는 생김새가 조금 다르다. 중정당의 세호
지난 여행에 이어 대구의 도동서원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수월루 2층에서 강당 방향을 바라보면 기둥과 기둥사이로 환주문과 중정당이 일렬로 눈에 들어온다. 그 옆으로 거인재와 거의재가 마주하고 있다. 중정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환주문을 통해야 한다. 환주문은 수월루 바로 뒤에 위치한다. 수월루에서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환주문에 다다른다. 수월루가 있기 전에는 이 환주문이 도동서원의 정문이었다. 환주문은 매우 인상적인 문이다. 너비가 약 1m 남짓이고 높이가 170㎝가 안되는 문이다. 따라서 환주문을 통하기 위해서는 거의 모든 성인들은 몸을 반드시 숙여야만 가능하다. ‘내 마음의 주인을 부른다’라는 환주문의 뜻을 생각해보면 ‘주인’을 만나기 위해서는 환주문을 통과하듯, 자신을 한껏 낮춰야 한다는 의미로 생각해볼 수 있다. 여기서 ‘주인’은 도동서원에 모셔진 ‘김굉필’ 선생일 수 도 있고, 아니면 학문의 목표에 도달한 ‘나’일 수도 있다. 혹은 김굉필 선생을 통해 학문의 목표에 도달한 나 일수도 있겠다. 환주문을 오르다보면 환주문 편액과 함께 중정당에 걸린 편액들이 모두 일렬로 눈에 들어온다. 중정당 외부에 걸린 ‘도동서원’ 편액과 함께, 중정당 내부에 걸린 ‘도동서
코로나 19로 몸살을 앓고 있는 대구와 경북은 유네스코에 등재된 9개의 서원 중 5개가 몰려있다. 경주의 옥산서원과 안동의 도산·병산서원, 그리고 영주의 소수서원을 포함해 대구의 도동서원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오늘은 공자의 도가 깃들어 있는 대구의 도동서원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대구 달성군 도동리에 위치한 도동서원(道東書院)은 선조 1년(1568)에 쌍계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 그리고 선조 6년(1573)에 쌍계서원으로 사액을 받았으나 임진왜란으로 서원은 소실되고 만다. 서원이 다시 건립된 것은 선조 37년(1604)이다. 이 때는 보로동서원이라 불렸고, 도동서원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은 것은 선조 40년(1607)이다. 도동(道東)이라는 뜻은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로 이 곳에 모셔진 김굉필에 대한 칭송이 담겨있다. 도동서원이 위치한 ‘도동리’라는 이름도 서원의 영향을 받아 마을 이름이 도동리로 불리게 되었다. 도동서원은 대니산 자락에 낙동강을 굽어보는 위치에 자리 잡았다. 임진왜란 후 재건하면서 새로이 잡은 자리이다. 지금의 도동서원 설립자는 김굉필의 외증손인 정구이다. 도동서원은 입구에서부터 감탄사가 나오는 서원이다. 입구에 있는
옥산서원에는 회재 이언적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회재는 이언적의 호이며 이언적은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이다. 1491년에 태어난 이언적은 중종9년(1514) 23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러나 순탄할 줄만 알았던 그의 관료생활은 40세(1531)가 되면서 큰 위기를 맞게 된다. 조선시대 언론기관에 해당하는 사간원에 근무 중이었던 이언적은 당시 실세였던 김안로의 재등용을 반대하면서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이언적은 고향으로 돌아와 독락당을 짓고 다시 관직에 나오기까지 약 7년간의 은거생활을 하였다. 이언적이 다시 조정으로 나아간 것은 김안로가 죽고 난 뒤인 46세(1537) 때였다. 이후 그의 벼슬길은 승승장구 하지만 을사사화에 연루돼 56세(1547)의 나이에 또 다시 유배를 떠나게 된다. 평안도 강계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이언적은 62세(1553)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한다. 6년간의 강계생활에서 그는 많은 저술을 남겼는데, ‘구인록’도 이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사후 13년이 지난 뒤에야 그의 신분은 다시 복권되었고, 다시 2년 뒤인 선조1년(1568)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이후 종묘에 배향(선조2년· 1569)되었다. 광해군
옥산서원은 강학중심서원으로 전면에 강당이 후면에 사당이 자리해 있다. 옥산서원의 강당인 구인당을 중심으로 마당 좌우에는 기숙사인 암수재와 민구재가 자리하고 있다. 구인당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가운데 대청마루 3칸과 좌우 1칸은 온돌방이다. 하지만 마당으로 면한 온돌방에는 창을 내지 않고 벽으로만 만들어져 있다. 좌우 온돌방이 양진재와 해립재이다. 양진재와 해립재는 ‘함께 인을 세우는’ 학업에 정진해야한다는 의미다. 강당 마당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동재는 민구재이며, 서쪽에 자리한 서재는 암수재이다. 민구와 암수의 의미는 공부를 함에 있어 ‘드러나지는 않지만 날마다 부지런히 힘써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엇이든 드러나기 전에 수면 아래 끊임없이 움직이는 노력이 있어야 하고 그 움직임이 끝없이 이어져 어느 순간 깨달음이라고 하는 성찰로 이어져 학업의 궁극적인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는 비단 조선시대의 학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살아가는 삶에 있어 모든 것이 다 이 원리와 상통된다. 구인당을 중심으로 동재와 서재, 그리고 남쪽의 무변루까지 옥산서원의 강학공간은 ‘ㅁ’자 형태로 옥산서원의 전체 컨셉인
남계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여행할 서원은 경주의 옥산서원이다. 옥산서원은 경주 안강읍 옥산리에 있으며 선조5년(1572)에 창건된 서원이다. 사액서원이 된 것은 선조7년(1574)이다. ‘옥산’이라는 이름은 서원 앞에 있는 ‘자옥산’이라는 산 이름에서 연유한다. 풍수전문가들은 옥산서원이 ‘봉황이 머무는 둥지형’에 속한다고 보고 있다. 둥지에 머무는 봉황을 보호하기 위해서일까? 옥산서원의 건물들은 답답하리만큼 폐쇄적으로 배치되어 있다. 계곡을 따라 난 숲길을 가다보면 옥산서원을 만나게 된다. 옥산서원의 정문은 역락문이다. 불규칙한 돌들을 기단으로 쌓고 그 위에 역락문을 앉혔다. 그래서 역락문에 오르기 위해서는 계단이 필요하다. 계단은 역락문 우측칸과 가운데 칸 위치에 2개만 만들어져 있다. 역락문은 3칸의 문으로 된 삼문형식이다. 그런데 오른쪽 칸의 문만 열려 있고 가운데 칸과 왼쪽 칸은 굳게 닫혀있다. 보통 서원의 출입문이 오른쪽으로 들어가서 왼쪽으로 나오는 것에 비하면 이 곳은 왼쪽 칸은 아예 이용할 수 없게 막혀 있다. 시작부터가 조금 색다름으로 다가온다. ‘역락’이라는 이름은 논어에서 따온 말로 공부를 함에 있어 출세를 목적으로 하지 말고 자신의 인격수
남계서원은 일두 정여창과 동계 정온, 개암 강익 선생을 모신 곳이다. 정여창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세종대부터 연산군대까지 활동했던 인물로, ‘일두(一?, 하나의 좀벌레)’라는 호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겸손한 학자였다. 정여창은 김종직의 제자로 들어가 김굉필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 성종25년(1494)에 안음현감으로 부임했을 때는 조세로 인해 고통을 받는 백성들을 위해 ‘편의수십조’를 지어 시행함으로써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편의수십조는 백성이 마땅히 편하게 살아야 할 열 가지 규칙을 말한다. 정여창은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는 진정한 현감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김종직의 제자였던 정여창은 1498년 무오사화를 피해가지 못하고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고 1504년 54세의 나이로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였다.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를 당하였다. 하지만 중종반정으로 다시 복권되고, 선조1년에 문헌공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광해군 2년(1610), 정몽주, 김굉필, 이언적, 조광조와 함께 동방5현으로 문묘에 배향되었다. 정여창을 모신 서원은 나주의 경현서원, 합천의 이연서원, 종성의 종산서원 등 9여 곳에 이르며 그 중 가장 주된 곳이 이
남계서원은 서원의 앞부분에 교육공간인 강당이 위치하고 그 뒤로 사당이 자리하는 전학후묘의 배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서원의 배치 형태는 당시 처음 있는 형식이었다. 이러한 배치 구조는 이후 한국 서원의 구조로 자리 잡게 되었다. 지난 여행에 만났던 풍영루가 유식공간에 해당한다. 오늘은 서원의 필수공간인 강학공간을 만나보자. 강학공간은 교육공간인 강당과 서원유생들이 머무는 기숙사 영역을 말한다. 남계서원의 강당은 명성당으로, 강학공간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명성당을 중심으로 앞 좌우에 서원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하고 있고, 서재 앞으로는 묘정비가, 동재 뒤편으로는 경판고가 자리하고 있다. 명성당은 다른 서원의 강당과는 다르게 전면 4칸인 건물이다. 보통은 홀수 칸 건물을 짓고 중앙인 가운데 칸에 건물의 편액을 걸게 되는데, 명성당은 4칸으로 짝수 칸이다. 이는 편액의 위치를 결정함에 있어 무척 난감해지는 상황이 발생한다. 4칸 건물의 중앙은 건축부재들로 인해 편액을 걸 수 없으니, 2번째 칸 또는 3번째 칸 중에 걸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쪽에 편액을 걸어도 한쪽으로 치우친 편액을 걸게 되는 것이다. 남계서원은 이를 재치 있게 해결 했다. ‘
2019년 7월 한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등재된 한국의 서원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 첫 번째로 갈 곳은 함양에 있는 남계서원이다. 남계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서원이다. 하지만 정유재란으로 인해 완전히 소실되었다. 현재의 위치에 복원된 것은 광해군 4년(1612) 때이다. ‘남계’라는 사액을 받은 것은 명종 21년이다. 남계서원은 소나무 숲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는 곳에 자리해 있다. 배산임수로 명당의 자리에 터를 잡은 남계서원의 ‘남계’는 서원 앞으로 흐르는 남강의 옛 이름을 일컫는다. 주차장에서 공원을 가로질러 남계서원으로 향하면 제일 먼저 홍살문을 마주한다. 홍살문은 한눈에 봐도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모습이다. 아쉽게도 홍살문 중앙의 태극문양 부분이 사라졌다. 덕분에 앞니가 빠진 홍살문이 되어 신성한 공간을 상징하는 위엄이 조금은 허술해졌다. 홍살문을 지나 남계서원의 정문을 향해 가면 2층의 풍영루가 눈에 들어온다. 기단위에 세워진 기둥이 이색적이다. 아래층은 화강석 기둥이고 2층은 나무 기둥이다. 2층은 계자난간으로 둘러싸여 한 층 멋스러움을 더한다. 안으로 진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