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유사에는 진표율사가 속리산에 길상초가 난 곳을 표시하고 그 곳에 사찰을 세울 것을 제자들에게 명하였고, 영심 스님 일행이 사찰을 세우고 길상사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길상사가 나중에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뀌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진표율사는 미륵불을 조성했던 스님으로 진표율사의 법을 받은 영심 스님도 법주사에 미륵불을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법주사는 화엄신앙과 더불어 미륵신앙을 중요한 핵심으로 삼고 있다.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면 눈에 띄게 큰 황금색으로 번쩍번쩍 거리는 부처님을 만나게 된다. 바로 청동 미륵대불이다. 미륵불을 쳐다보려면 끝없이 고개가 뒤로 젖혀지는데 이는 건물 10층의 높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조선 고종 9년에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당백전을 만들기 위해 불상이 몰수되었고 법주사는 내내 미륵불이 없이 지내다가 1939년에서야 미륵불을 세우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완성되지 못했다. 해방 후 1960년대에 시멘트로 완성되었던 불상은 2015년에야 지금의 부처님 다운 미륵불로 완성되었다. 이 미륵불을 조성하는데 160여톤의 청동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가히 국내 최대 규모라 할 만하다. 미륵불은 미래에 오시는 부처님
조선시대 법주사는 60여동의 전각과 70여개의 암자를 거느린 큰 사찰이었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전쟁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법주사의 규모는 줄어들었고 현재는 30여동의 건물만 남아있다. 법주사에서 하나만 볼 수 있다면 주저 없이 팔상전을 선택하겠다. 국보55호로 지정된 팔상전은 하루 종일 바라보아도 시간이 부족하다. 팔상전이라는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석가모니의 일대기를 그린 8폭의 팔상도가 모셔져 있다. 다른 사찰의 팔상전과는 달리 한 벽면에 두 폭씩 사방에 나누어 배치해 놓은 것이 특징이다. 팔상도를 보려면 자연스럽게 탑돌이를 하듯 팔상전 전각 내부를 한 바퀴 돌게 된다. 팔상도 앞 불단에는 불상을 봉안했다. 불상은 석가모니불이 주불이며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을 협시보살로 모셨다. 석가모니불 뒤로는 영산회상도가 후불탱화로 모셔져 있다. 불상 앞에는 500나한상이 3줄로 배치되어 있다. 500나한상의 모습들이 제각각이다. 각자의 개성이 물씬 풍긴다. 개성이 담긴 부처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펴보는 묘미가 있다. 팔상전 안 탑돌이를 마치고 팔상전 밖으로 나온다. 팔상전은 5층으로 된 목조탑이다. 밖에서 보면 5층이지만 안에서 보면 통층이다. 탑이면서도 부처님과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법주사는 창건된 지 약 1천500여년 가까이 되는 사찰이다.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승려 의신에 의해 창건되었으며 법주사라는 이름 또한 의신이 인도에서 불경을 구해 흰 나귀에 싣고 와서 머물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천년의 역사가 훌쩍 넘은 법주사, 유네스코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더욱 빛내고 있는 법주사로 여행을 이어가보자. 금강문을 나오면 천왕문까지 일직선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천왕문에 눈길을 주기도 전에 천왕문 앞에 하늘로 곧게 뻗은 두 그루의 전나무로 시선이 쏠린다. 마치 수문장처럼 우뚝 서 있는 전나무는 왜 사천왕상이 있는 천왕문 앞에 자리하고 있을까? 정확하게 밝혀진 바는 없으나 참선을 함에 있어 곧게 뻗은 전나무처럼 곧은 자세로 참선에 임하겠다는 그런 의미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금강문과 천왕문 사이에는 이 전나무 말고도 하늘 높이 치솟은 철 당간이 있다. 철 당간은 현대에 와서 복원한 것으로, 고려시대에 처음 만들어졌다. 보통 당간은 돌로 만든 것이 많이 남아 있고 철로 된 당간은 몇 개 남아 있지 않다. 당간은 사찰에서 법회가 있을 때 행사의 내용을 알리는 그림 등을 걸어두는 장대이다. 그러나 꼭 행사
오늘은 단풍과 함께 법주사로 여행을 떠나보자. 매표소를 지나면 숲길을 따라 법주사로 향한다. 사찰의 중심영역으로 가기까지 걷는 이 길이 여행자에겐 여유와 힐링의 시간이다. 이 길에서 일주문을 비롯한 몇 개의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다. 일주문 좌우로는 제법 큰 도로가 나 있다. 오른쪽으로는 차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어 차량이 지나갈 때의 일주문과 차량이 없을 때의 일주문의 모습이 사뭇 달라 보인다. 차량이 없을 때는 숲속에 안긴 듯 주변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지만 차량이 지나갈 때는 어색함이 가득하다. 일주문은 단청에 푸른 계열의 색을 많이 사용해 멀리서도 파란 색의 기운이 일주문을 전체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일주문의 편액은 2개가 있는데 전면과 안쪽에 걸려 있다. 안쪽에 ‘俗離山 大 法住寺(속리산 대 법주사)’라 쓰인 편액 글씨체가 독특하다. 문자도와 비슷하다. 문자도의 읽기 어려움을 배려해서일까 한자로 주석을 붙인 것이 흥미롭다. 일주문을 지나 부도전으로 가보자. 부도전은 고승들의 부도를 한 곳에 모신 것으로 부도는 승려들의 사리를 모신 승탑을 말한다. 법주사 부도전은 부도의 생김새가 다양한 것이 특징이다. 부도전을 지나면 하마비를 만날 수 있
시간이 흐를수록 규모가 커지는 사찰들이 많다. 당연히 세월이 지날수록 사찰의 규모도 커져야겠지만, 그래도 과거의 추억을 더듬어 다시 찾았을 때 옛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사찰에 적잖이 실망을 하게 된다. 그러한 면에서 봉정사는 늘 갈 때마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 곳이다. 지난 여행에 이어 오늘도 봉정사 여행을 이어가보자. 극락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고금당과 화엄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극락전과 고금당, 화엄강당이 만들어낸 마당에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이 삼층석탑은 극락전의 단순함과 한 세트처럼 수수한 느낌이다. 상륜부 꼭대기의 장식도 일부만 남아 있다. 이 곳에서는 삼층석탑보다도 더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 있으니 바로 삼층석탑 앞에 쌓인 돌탑들이다. 지난 5월 영국 앤드루 왕자가 방문했을 때도 이 돌탑에 돌을 쌓았었고, 엘리자베스 여왕이 오셨을 때도 이 돌탑에 소망의 돌을 쌓았다. 그래서 삼층석탑보다도 더 유명세를 탄 돌탑이 됐다. 극락전 마당 좌우에 있는 고금당과 화엄강당은 모두 보물로 지정된 건물들이다. 고금당이 보물 제449호, 화엄강당이 보물 제448호로 지정됐다. 두 건물 모두 조선 중기의 건물이다. 고금당은 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봉정사는 천등산에 자리하고 있다. ‘천등’이라는 명칭은 봉정사의 창건설화와 관련이 있다. 봉정사를 처음 창건한 분은 신라 문무왕 때 능인대사로 보고 있다. 당시만 해도 천등산은 대명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 대명산의 바위굴에서 수년간 수도를 하던 능인대사에게 아름다운 여인이 찾아와 능인대사의 지덕에 반해 찾아왔다며 능인대사를 모실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능인대사는 그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고 끝내 그 여인에게 깨달음을 주어 돌려보낸다. 능인대사가 돌려보낸 여인은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능인대사를 시험하기 위해 내려온 천상의 여인이었다. 여인이 하늘로 올라가면서 옥황상제가 내려준 하늘의 등불로 바위굴을 밝혀주었고, 환한 불빛으로 더 깊은 도를 닦을 수 있기를 기원해주었다. 시간이 흘러 능인대사는 득도를 했고, 도력을 이용해 종이 봉을 만들어서 날려 보냈다. 그리고 종이 봉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앉은 곳에 사찰을 지었고 그 사찰이 바로 봉정사이다. 봉정사가 자리한 천등산도 하늘의 등불로 인해 득도를 하였다하여 천등산이라 불리며, 바위굴도 천등굴이라 이름 지어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봉정사에서 조금 떨어져 있지만 천등굴을
아침저녁으로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한 낮은 아직 덥지만 그래도 시원한 바람을 느끼며 문화유산여행을 하기에는 좋은 계절이다. 오늘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을 간직한 사찰로 유명한 봉정사로 여행을 떠나보자. 봉정사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안동을 다녀간 20주년을 기념해 그의 차남 앤드류 왕자가 2019년 5월에 다녀가기도 했다. 봉정사는 일주문이 가장 강렬하게 우리를 맞이하는 곳이다. 다른 어떤 사찰보다는 일주문의 존재를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으니 말이다. 오르막길에 서있는 일주문으로 인해 그 앞에 서면 일주문의 위엄이 더욱더 무게감 있게 전해진다. ‘천등산봉정사’라는 빛바랜 편액에서 천년고찰의 세월을 느끼며, 발아래 밟히는 유네스코 등재 세계문화유산이라는 표지석을 바라보며 우쭐해지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세속인의 모습이다. 일주문은 정면에서의 모습과 측면에서의 모습이 사뭇 다른데 측면의 모습이 좀 더 감동적이다. 맞배지붕에 풍판을 댄 지붕을 하나의 기둥으로 떠받치고 있는데 기둥하나가 버거웠던지 양쪽으로 나무를 추가로 덧대어 놓았다. 마치 머리가 큰 가분수의 형태를 하고 있는 일주문이 숲속에 나 홀로 서있는 모습이 사람의 마음을
지난 여행에 이어 마곡사 여행을 이어가보자. 무더운 여름, 오층석탑에서 고개를 들면 대광보전과 대웅보전이 층층이 이어진다. 먼저 대광보전으로 발길을 옮긴다. 대광보전 가까이 다가가니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창호문양이다. 정면 5칸의 대광보전에는 1칸에 3짝의 창호로 이뤄져 있다. 그런데 3짝의 창호 문양들이 제각각 독특하다. 화려한 색채감은 없지만 덕분에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어 전각과는 훨씬 더 잘 어울린다. 그걸 알아서일까, 사람들은 창호문양 앞에서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창호 문양 하나만으로도 빛나는 대광보전이다. 창호문양을 따라 시선을 건물 위로 옮기다보면 군데군데 단청이 지워지고, 검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멋스럽게 쓰여진 대광보전 편액 글씨를 만난다. 한자로 쓰여진 대광보전 편액 글씨는 거침없이 흘려 쓴 듯 하면서도 모나지 않은 부드러움이 느껴진다. 바로 표암 강세황 선생의 글씨이다. 대광보전 편액을 썼던 시기는 표암 강세황 선생이 연경에 가서 글씨로 이름을 떨치고 돌아온 후로, 표암 강세황 선생은 청나라 건륭 황제로부터 ‘미불(중국 북송의 서예가, 송4대가의 하나로 꼽히는 인물)보다는 아래이나 동기창(중국 서예의 대가로 북경
마곡사는 김구선생님 덕분에 다른 사찰보다 훨씬 더 친근한 곳이다. ‘春마곡’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봄이 무척 아름다운 사찰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어느 계절에 가더라도 마곡사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니 시간이 허락한다면 주저하지 말고 가보길 권한다. 무더운 여름이지만 마곡사 여행을 함께 떠나보자. 마곡사는 동방에서 가장 복된 땅이라 일컬어지는 풍수 좋은 땅에 자리하고 있다. 마곡사는 태화천을 사이에 두고 남원과 북원으로 구분하는 독특한 배치형태를 가지고 있다. 640년 백제 무왕 4년에 신라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곳이다. 주차장에서 산책하듯 걷다보면 마곡사 일주문을 만난다. 일주문을 지나 영산전으로 가보자. 영산전은 보물 제800호로, 현재 남아있는 마곡사 전각들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또한 남원의 중심전각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영험이 좋은 곳이다. 가운데 돌계단을 오르면 소박한 영산전의 외모와 달리 화려한 영산전의 내부를 만나게 된다. 보통 영산전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영축산에서 설법을 하는 모습을 그린 영산회상을 모시는데 마곡사 영산전은 석가모니부처님을 중심으로 과거칠불을 모셨다. 과거칠불 뒤편으로 1
연일 무더위가 시작되더니 단비가 내려 제법 선선한 아침을 맞는다. 그래도 한낮의 무더위는 이어진다. 오늘은 무더위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을 통도사의 마지막 여행을 이어가보자. 통도사 하면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금강계단이다.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사리를 봉안해 놓은 곳이다. 계단(戒壇)이란 스님이 계를 받는 단, 즉 계를 수여하는 의식이 진행되는 곳이 바로 금강계단이다.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진 이곳에서 계를 받는 것은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같은 의미라 할 수 있어서 더욱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따라서 통도사의 역사는 이 금강계단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자장율사께서 처음 만들었던 금강계단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수를 했으며 오늘에 이르렀다. 자장율사께서 처음 세우신 금강계단의 모습은 잘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사방으로 넓게 사각형으로 조성된 2단의 기단이 자리하고 기단 중앙에 아담하게 돌로 만든 석종형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금강계단을 마주하면 처음 드는 생각은 ‘눈부시다’이다. 너무 깨끗해서, 너무 맑아서 눈부시다. 왜 이렇게 깨끗한 느낌일까? 불자들의 정성도 많이 깃들여있겠지만 모든 날 짐승은 금강계단 위로는 날지 않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