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도사는 선덕여왕 15년 자장율사에 의해 창건된 천년고찰로, 영축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통도사는 승려들의 참선수행 전문도량인 ‘선원’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 그리고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 모두를 갖춘 총림에 해당된다. 우리나라에는 총림이 8군데가 있는데, 통도사를 비롯해 송광사, 수덕사, 백양사, 해인사, 동화사, 쌍계사, 범어사 등이 이에 해당한다. 오늘은 지난 여행에 이어 영축총림 통도사 여행을 이어가보자. 하노전을 지나면 중노전 영역으로 진입한다. 중노전은 불이문부터 세존비각까지의 영역이다. 불이문은 ‘둘이 아니다’라는 뜻으로 ‘진리는 곧 하나’라는 의미이다. 대웅전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문으로 이 문을 통과해야만 진리의 세계인 불국토에 들어갈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이다. 따라서 이 문을 통과하면 해탈에 이른다는 의미로 ‘해탈문’이라고도 한다. 조선 중기 이후의 건물로 추정되는 불이문은 내부 천정에 대들보 대신 코끼리와 호랑이 문양을 조각한 부재를 연결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불이문을 지나면 관음전을 비롯해 우측으로 용화전, 대광명전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관세음보살을 모신 관음전은 조선시대의 건물이다. 작은 건물이지만 출입
통도사는 2018년 6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경남 양산에 자리한 통도사는 수도권에서 출발해 다녀오기에는 늘 큰맘을 먹어야만 가능하다. 하지만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통도사는 불자가 아닌 필자에게도 큰 의미로 와 닿는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어 불보사찰로 불리는 통도사로 여행을 떠나보자. 주차장에 차를 대고 오르면 통도사 진입로인 ‘무풍한솔길’을 만난다. 물론 왼쪽으로 차도가 나있지만, 사찰여행에서 사찰의 첫 이미지를 결정하는 첫 만남을 무정하게 차로 할 수는 없는일, 당연히 오른쪽으로 나있는 숲길로 발걸음을 옮긴다. 1㎞ 남짓 걷게 되는 무풍 한솔길은 우거진 나무숲을 아치 삼아 꽤나 넓은 도보길이 나있다. 통도사는 전각들의 배치가 조금 독특하다. 왼쪽으로는 통도사 전체를 휘감고 흐르는 물길이 있고, 물길 건너편으로 전각들이 자리하고 있다. 전각들은 위에서부터 3개의 영역으로 구분해 상, 중, 하의 이름을 붙여 상노전, 중노전, 하노전 영역으로 구분한다. 아래 하노전부터 차례로 만나보자. 천왕문을 들어서면 하노전이 시작된다. 하노전은 여느 사찰에서나 만날 수 있는 사물이 걸려있는 범종각과 만세루 등이 자리하고 있다. 하노전의 가장 중
정호승님의 시에는 ‘선암사’라는 시가 있다. 필자에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 있는 이 시는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중략)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라는 내용이다. 걸어서라도 가서 슬픔을 쏟아내고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곳, 그곳이 바로 선암사다. 선암사는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들로 넘치는 곳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꼭 보고 와야 할 요소들이 있다. 그 첫 번째가 선암사 해우소, 즉 측간이다. 선암사 측간은 영월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선암사의 측간은 들어가는 곳에 걸려 있는 간판이 ‘뒷간’이다. 글씨도 우측에서 좌측으로 씌어 있는데다 한글고어가 그대로 남겨있어 측간을 읽어내는 사람들의 표정이 다채롭다. 들어가는 입구에서는 1층으로 보이나 뒤돌아가서 보면 2층으로 되어 있어 비탈진 곳을 잘 활용해 지어진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정유재란(1597) 때 모든 전각이 소실됐으나 이 건물을 불에 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400년
5월 12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았다. 지난 여행에 이어 이번에도 선암사 여행을 계속 떠나보자. 먼저 지장전을 만나보자.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이 협시로 모셔져 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서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지옥에 들어가 중생들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왼쪽의 도명존자는 우연히 사후세계를 경험하고 지장보살의 협시가 되었으며, 우측에 모셔진 무독귀왕은 사람들의 악한 마음을 없애주는 존재이다. 지장전에는 염라대왕을 비롯한 명부의 십대왕이 함께 모셔져 있다. 그래서 지장전은 명부전 또는 시왕전으로도 불린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7일마다 한 번씩 심판을 받게 되는데, 이 때 심판을 맡은 명부세계의 왕들이 바로 10왕이다. 한마디로 지장전은 지장보살을 모시고 죽은 이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전각이다. 이제 원통전으로 걸음을 옮겨보자. 원통전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그래서 관음전이라고도 불린다. 주불로 모신 관세음보살은 우리에게 친숙한 보살님이다. 굳이 불교를 신앙으로 삼지 않더라도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이라는 문장은 접해 보았을 터이니 말이다. ‘나무아미타
승선교를 지나 선암사로 한발자국 더 가까이 올라보자. 승선교를 지나면 승선교 홍예 사이로 바라보았던 강선루를 만난다. 강선루는 계곡에 기둥을 걸친 채 지어졌다. 승선교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그리 커 보이지 않더니 바로 앞에서 마주하니 우러러 보이는 게 생각보다 큰 누각이다. 강선루는 앞과 뒤의 편액글씨체가 다르다. 둘 다 고종시기에 쓰여 졌지만 쓴 사람들이 서로 다르다. 정면에 걸린 편액은 김돈희 선생이 쓴 것으로 조금 두껍고 부드럽지만 강인함이 느껴진다. 뒷면에 걸린 편액은 윤용구 선생이 쓴 것으로 가늘고 군더더기 없는 강선루의 느낌이 묻어난다. 두 개의 편액 중 어느 것이 더 강선루와 잘 어울리는가! 비교하고 느껴보는 것도 하나의 묘미이다. 강선루를 지나면 삼인당 연못을 만난다. 삼인당 연못은 통일신라시대의 연못으로 연못의 생김새가 아주 독특하다. 기다란 타원형 모양의 연못에 다시 타원형의 섬이 자리하고 있다. 연못가에는 세 그루의 나무가 우뚝 솟아 있다. 도선국사가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연못에는 불교의 대의를 담고 있다. 큰 타원형은 ‘스스로 깨닫고 남들도 깨닫게 하라’는 ‘자각각타(自覺覺他)’, 작은 타원형은 ‘스스로 많이 배우고 닦아서 자기를
천년 꽃절이라는 수식어가 참 잘 어울리는 선암사는 이른 봄에 다녀오기 좋다. 2018년 한국의 전통산사 7사찰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 7사찰 중 하나가 바로 선암사이다. 오늘은 봄과 잘 어울리는 선암사로 여행을 떠나보자. 본격적인 선암사 여행을 떠나기 전에 선암사하면 손꼽히는 4가지 특징을 먼저 살펴보자. 첫째, ‘천년’이라는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선암사는 천년이 넘은 사찰이다. 창건 시기는 백제성왕 5년인 527년 아도화상이 창건했다는 설과 함께 통일신라 875년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설 2가지로 크게 나뉜다. 하지만 창건설화 두 가지 모두 천년을 훌쩍 넘겨서 ‘천년사찰’이라는 타이틀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둘째는 ‘꽃절’이라는 이름에 맞게 천연기념물 제488호인 매화가 있는 곳이다. 선암사에 있는 매화라 해서 이름 또한 ‘선암매’라는 별도의 명칭이 붙어 있을 정도로 선암사의 매화는 유명하다. 셋째는 승선교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손꼽히는 승선교는 사진작가들의 단골 촬영지이다. 넷째는 선암사의 숨겨져 있는 특징으로 승려들이 결혼할 수 있는 태고종의 총본산이라는 점이다. 보통 승려들은 결혼하지 않는 것으로 알
‘꼭두’하면 생각나는 것이 ‘꼭두새벽’, ‘꼭두각시’라는 말이다. 꼭두새벽은 올빼미형인 사람에게는 반가운 말은 아닐 것이다. 꼭두각시 또한 주체성을 잃어버리고 누군가 시키는데로 하는 일반적인 의미로 볼 때 ‘꼭두’는 그다지 반갑고 친근한 말은 아니다. 하지만 꼭두는 이승과 저승을 연결하는 존재로 기독교의 ‘천사’와 같은 존재이다. 오늘은 꼭두를 만나러 여행을 떠나보자. 꼭두는 장례식 상여에 많이 사용됐다. 꼭두는 상여에 매달려 있는 인물상이나 동물, 식물의 형상으로 나무로 만들어져 목우(木偶)라고도 한다. 꼭두를 만나기 위해서는 북촌한옥마을의 ‘꼭두랑 한옥’을 찾거나 아니면 국립민속박물관의 제3전시관을 찾으면 된다. ‘꼭두랑 한옥’에서는 꼭두 하나하나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반면에 국립민속박물관에서는 꼭두가 상여의 어디에 위치해 있는 지를 살펴볼 수 있다. 오늘은 상여에 자리한 민속박물관의 꼭두를 만나보자. 진주호단친목회에서 기증한 상여는 일단 그 규모 면에서 놀라고, 상여가 지닌 화려함에 한 번 더 놀란다. 그리고 수많은 꼭두와 장식에 감탄을 하게 된다. 4층 누각식 건물형태를 하고 있는 상여는 맨 위 지붕이 청색으로 칠해져 있어 자연스럽게 청기와를 연
천안 독립기념관의 중심은 겨레의 집이다. 독립기념관의 상징이기도 한 겨레의 집은 동양 최대의 기와집 모양으로 수덕사 대웅전을 본떠 만들어졌다. 겨레의 집을 거쳐 독립기념관 제 3관인 나라 지키기 관으로 먼저 출발해보자. 나라 지키기 관에서 눈여겨 볼 유물은 바로 민영환 선생님의 명함유서이다. 민영환 선생님은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자신의 명함에 ‘2천만 동포에게 남긴 유서’를 남겼다. ‘동포 형제들이 뜻과 기개를 굳건히 하고 학문에 힘써 마음으로 단결하고 힘을 합해 자주독립을 회복하면 저승에서 기뻐하며 웃을 것이다’라는 내용의 유서이다. 조그마한 명함에 깨알같이 써내려간 민영환 선생님의 유서. 이 유서를 남기며 그는 서울의 인사동에서 죽음으로 일본에 항거하셨다. 이 작은 명함에 깨알 같은 글씨로 유언을 남길 때 선생님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감히 짐작하기가 조심스럽다. 다음은 안중근 의사의 단지혈서 엽서를 만나보자. 엽서 윗부분에는 ‘大韓義士安重根血書’라는 제목이, 엽서 중앙에는 태극문양과 ‘大韓獨立’이라는 글자가 적혀있다. 하단에는 ‘안 의사의 손가락’과 ‘안 의사의 단총’이라는 글자와 사진이 자리하고 있다. 엽서 오른쪽에는 동맹에 대한 글씨가 적혀있는데 ‘동지
2019년은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곳곳에서는 3·1운동 관련 행사도 많이 진행된다. 3월 1일이 되면 유난히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생각난다. 그래서 오늘은 천안의 독립기념관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기로 하자. 천안 독립기념관은 국민의 성금을 모아 건립된 기념관으로 1987년 8월 15일 일반인에게 공개됐다. 개관 당시 쏟아지는 소나기 속에서도 하루 20만~30만명의 관람객이 다녀갈 정도로 전 국민의 관심은 뜨거웠다. 당시의 뜨거웠던 관심에 비하면 요즘 독립기념관과 독립운동가에 대한 관심은 많이 줄어든 것으로 느껴진다. 독립기념관은 동양 최대의 건물인 겨레의 집과 7개의 전시관, 그리고 야외전시관으로 구성돼 있다. 천안 독립기념관이 조금 더 의미 있는 이유는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문에서 겨레의 탑을 지나 왼쪽으로 오르면 조선총독부 철거 부재 전시공원을 만날 수 있다. 보통의 관람동선을 따르면 자칫 놓치기 쉬운 장소이기도 하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일제강점기 서울 경복궁의 많은 전각들을 철거하고 경복궁의 법전인 근정전을 가로막으면서 지어진 건물로 광복 이후에도 미군정 청사와 대한민국
연일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더니 다시 겨울의 매서움이 느껴진다. 하지만 입춘이 지나서일까 겨울의 칼바람에서도 상쾌함이 느껴지는 듯하다. 오늘도 겨울의 창덕궁 후원여행을 이어가보자. 경치 좋은 곳이면 어김없이 들어서는 것이 바로 정자이다. 창덕궁 후원에도 어김없이 정자가 들어서 있다. 먼저 관람정 권역으로 가보자. 관람정 권역에는 반도지(半島池)를 사이에 두고 4개의 정자가 적당한 간격을 둔 채 자리해 있다. 관람정은 연못에 걸쳐 자리하고 있고 연못 반대편으로 승재정과 폄우사, 그리고 존덕정이 위치하고 있다. 관람정은 부채꼴 모양의 정자이다. 관람정의 특이한 점은 편액이다. 일반적인 편액의 모습이 아닌 나뭇잎 모양이다. 나뭇잎도 부채꼴 모양처럼 휘어있다. 편액의 색깔이 연그린에 흰색의 글씨가 쓰여 있어 색다른 느낌이다. 관람정의 부채꼴 모양의 지붕선과 편액의 부채꼴로 휘어진 나뭇잎 모양의 편액의 선을 함께 보는 묘미가 멋지다. 관람정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요소가 하나 더 있다. 바로 댓돌이다. 정자로 올라가는 2단의 댓돌모습이 재밌게도 정자의 부채꼴 모양과 같은 선형을 유지하고 있다. 2단의 댓돌을 오르고, 다시 정자 위로 올라서는 정자바닥의 선이 곡선으로 통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