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먼지가 여행을 나서는 발목을 붙잡는다. 그러나 유관순 열사를 찾아 나서는 길에 미세먼지가 대수랴. 마스크로 위안을 삼아보며 오늘도 문화유산 여행을 이어가보자. 유관순 기념관을 빠져 나와 계단을 올라가면 유관순열사의 추모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추모각은 유관순 열사의 애국정신을 추모하고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뜻을 기리기 위해 1972년에 건립되었으며, 매년 추모제를 거행하고 있다. 추모각 내부 중앙에는 유관순 열사의 영정이 자리하고 있다. 영정 속에서의 유관순 열사는 태극기를 두 손으로 꼭 쥐고 나라를 걱정하는 표정과 결의에 차 있는 당찬 모습이다. 추모각 왼쪽으로 난 길을 통해 산길로 향한다. 산길로 접어들어 돌계단을 오르면 유관순 열사의 초혼묘를 만나게 된다. 초혼묘는 영혼을 위로하는 묘이다. 다시 말하면 이 묘에는 유관순 열사의 시신이 없다. 그럼 유관순 열사의 시신이 묻힌 묘는 어디에 있을까? 안타깝게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아우내장터의 만세운동 주동자로 붙잡힌 유관순은 징역 3년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지만 끝내 살아서 나오지 못한다. 1920년 9월28일에 사망한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에서 인수받아 이태원공동묘지에 안장이 되었지
‘병천’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도 병천 순대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병천은 순대보다 더 유명하고 뜻깊은 곳이다. 바로 독립운동을 하다 18세의 꽃다운 나이로 세상을 등진 유관순 열사의 발자취가 있는 역사적 장소이기 때문이다. 3·1절 행사가 곳곳에서 펼쳐지는 3월, 오늘은 천안 유관순 열사 유적지를 찾아 여행을 떠나자. 우리 세대에서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항상 ‘유관순 누나’라는 호칭이 익숙하지만 요즘엔 유관순이라는 이름 뒤에는 항상 ‘열사’라는 호칭이 붙는다.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한테는 이 ‘열사’말고도 ‘의사’라는 호칭이 붙기도 하는데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 같은 분들이 대표적이다. 열사나 의사 모두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들한테 붙여지지만 의사의 경우는 무력을 동원해 맞서 싸웠던 분들에게 붙여진 반면, 열사는 맨몸으로 일본과 맞서 싸운 분들에게 붙여진 호칭이다. 따라서 ‘유관순 열사’라는 이름만으로도 맨몸으로 일본에 저항하며 독립운동을 했을 유관순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천안시 병천면에 위치한 유관순 열사 유적은 기념관, 추모각, 초혼묘, 봉화탑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까운 곳에 생가도 위치해 있어 유관순 열사를 만나기에 더 없이 좋
우리 고유의 설 명절이 지났다. 이번 설에는 아주 간만에 빳빳한 신권으로 세뱃돈을 받았다. 신권으로 받은 세뱃돈이 무척 마음에 든다. 세뱃돈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지폐의 색깔과 금액에 시선이 간다. 하지만 우리가 주고받는 이 세뱃돈에도 문화유산이 숨겨져 있다. 오늘은 세뱃돈 속에 숨겨진 문화유산을 찾아 여행을 떠나보자. 세뱃돈으로 받은 빳빳한 신권은 모두 1만원권이다. 1만원권의 앞면에는 세종대왕이 중심을 잡고 있다. 세종대왕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래서일까. 1960년에 모델로 처음 발탁된 세종대왕은 지금까지 약 58년의 시간을 지폐 모델로 굳건히 자리매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09년 5만원권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항상 고액권의 지폐모델이었다. 그런데 화폐 속 세종대왕의 모습은 실제 세종대왕의 모습이 아니다. 지폐 속 세종대왕은 표준영정으로 김기창 화백의 작품이다. 세종대왕 좌측으로는 하나의 그림이 있다. 해와 달, 다섯 개의 산 등이 그려진 그림이다. 이 그림은 일월오악도로 왕을 상징하는 그림이다. 조선시대 궁궐 건물에는 임금이 앉는 어좌 뒤에 항상 이 그림이 배치되었다. 심지어는 궁 밖 행차 시에도 별도로 챙겨갈 정도이니 임
덕수궁에서 길 건너편 조선 호텔 쪽을 바라보면 조그맣게 황궁우의 지붕이 눈에 들어온다. 덕수궁에 이어 오늘은 대한제국의 상징이자 황제의 상징인 환구단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환구단은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황제의 지위를 상징하는 곳이다. 황제는 새해가 되면 나라와 백성들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이 제사를 ‘기곡제’라고 한다. 기곡제는 숙종 9년에 사직단에서 대신 거행한 바 있다. 이후 정조대에서도 사직단에서 기곡제를 행한바 있다. 환구단이 이곳에 자리하게 된 것은 고종의 황제즉위와 맞물려서이다. 아관파천 이후 덕수궁으로 환어하시면서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로 정한 고종은 환구단의 설치를 명하셨다. 1897년 8월 환구단의 위치를 정하고 한 달여 만에 환구단은 완공되었다. 이렇게 완공된 환구단은 대한제국의 공식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며 천자(天子)의 나라임을 세계에 공표하는 상징적인 곳이었다. 덕수궁에서 환구단까지 이어질 황제의 행렬을 위해 군사와 순검들이 도열하였으며, 인근가옥에서는 집집마다 태극기를 걸어 애국심을 드러냈다. 황제의 행렬 모습은 기존 행렬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는데, 첫째는 행렬 앞에 자리한 태극기
미세먼지가 연일 극성을 부리더니 오늘은 조금 나아진 듯싶다. 마스크를 장착하고 지난 시간에 이어 덕수궁 산책을 계속 떠나보자. 연꽃 봉우리를 간직한 금천교는 금천 위에 놓인 다리다. 금천은 존엄하신 황제가 계신 궁궐 안의 세계와 백성들이 사는 바깥세상이 구분한다. 그러나 이 두 세계가 물길로 구분만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백성들의 여론이 들어와야 하며, 민심을 제대로 읽어낸 황제의 명령은 다시 세상으로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세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 금천교가 놓여 있다. 금천교를 지나 한참을 걸어가면 중화문을 만난다. 중화문은 법전인 중화전으로 향하는 출입문이다. 중화문 앞에는 답도가 자리하고 있다. 답도의 문양은 도무지 알아보지 못할 만큼 희미하지만 황제의 궁궐답게 다른 궁궐과는 달리 용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렇게 답도의 용 문양처럼 중화문과 중화전 일대는 황제의 궁궐임을 알 수 있는 상징들이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 첫 번째는 용문양이다. 답도의 용과 함께 중화전 내부 천정에도 용이 자리하고 있다. 두 번째는 중화전의 창살색과 중화전 내부의 어좌의 색상이다. 창살색과 어좌의 색상이 모두 노랗게 칠해져 있다. 이는 황제의 색을 나타낸 것이다.
새해를 맞아 가까운 덕수궁 산책에 나섰다. 여전히 덕수궁 앞은 차들로 붐비고 차가운 날씨에 사람들의 발걸음은 종종거리며 뛰어가듯 재빠르다. 덕수궁의 역사는 임진왜란으로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에 타면서 시작될 수 있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의주로 피난을 갔던 선조임금이 서울로 돌아왔을 때는 머물만한 궁궐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월산대군의 후손의 집을 임시 행궁으로 삼게 된 것이 덕수궁의 탄생이었다. 당시에는 ‘정릉동 행궁’이었지만 선조임금의 뒤를 이은 광해군이 창덕궁을 재건하여 옮기면서 덕수궁은 ‘경운궁’이라는 공식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그러나 270여 년 동안 빈 궁궐로 남아 궁궐로서의 제 역할을 하지 못하게 된다. 덕수궁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 것은 아관파천 이후다. 을미사변 이후 경복궁에 있던 고종임금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공사관으로 아관파천을 단행하였다. 이후 궁궐로 돌아오는데 경복궁이 아닌 덕수궁으로 돌아오게 된다. 덕수궁으로 돌아온 고종임금은 어느 나라의 눈치도 보지 않는 자주 독립 국가를 만들기 위해 나라이름을 ‘대한제국’이라 바꾸고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런데 ‘경운궁’이라는 이름은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왜 바뀌었을까? ‘덕수’
쇳대박물관 입구에는 ‘최가 철물점’이라는 작은 안내판이 자리하고 있다. ‘최가 철물점’이라는 이름에서 친근하면서도 고집스런 장인의 냄새를 엿볼 수 있다. 지난번에 이어 빗장 여행을 이어가보자. 빗장은 4층에도 전시되어 있지만 3층 기획전시실에서 더 많은 빗장의 종류를 만날 수 있다. 빗장에는 반드시 기다란 막대를 걸 수 있는 둔테가 필요한데 이 둔테는 한 쌍으로 만들어 부착하였다. 그래서 빗장의 전시물들은 모두 한 쌍씩 셋트로 전시되어 있다. 거북등모양이 각양각색이다. 나무 결을 그대로 살린 것이 있는가 하면, 실제 거북등딱지처럼 모양을 한 땀 한 땀 새겨넣은 것도 만날 수 있다. 둔테의 모양은 물고기 모습도 만날 수 있다. 물고기는 눈꺼풀이 없어 늘 눈을 뜨고 있다. 그래서 늘 눈뜨고 집안을 지켜주길 바라는 마음이 물고기 빗장에는 담겨 있다. 3층 기획전시실을 벗어나 다시 4층으로 발길을 옮겨보자. 4층의 빗장 코너에는 아프리카의 빗장도 전시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빗장은 거북과 물고기 같은 모양이어서 귀엽고 앙증맞은 반면 아프리카 빗장에서는 약간의 비장함이 느껴진다. 빗장코너를 지나 한 칸씩 자리하고 있는 18개의 독특한 자물쇠를 마주한다. 고려시대의 자물
수년 전 차가운 바람이 드세게 몰아치는 어느 날 우연히 찾아 들었던 곳이 쇳대박물관이었다. 그 때의 추억을 더듬어 간만에 대학로를 찾았다. 오늘은 대학로에 자리한 쇳대박물관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이른 아침 마로니에공원을 지나 대학로 골목길을 한참을 찾아 ‘쇳대’라고 적힌 독특한 박물관 외관을 만난다. 계단을 올라 박물관 입구로 올라 내부로 향한다. 4층 상설전시관으로 먼저 올라보자. 4층 전시실 입구 통로에는 각종 열쇠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어 인테리어 효과뿐만 아니라 쇳대 박물관의 특색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쇳대’는 ‘열쇠’를 뜻하는 사투리이다. ‘쇳대’라는 말은 신세대들에겐 낯선 단어일 수 있으나 우리에게는 꽤나 익숙한 단어다. 어려서 할머니를 비롯해 부모님들로부터 접했던 말이어서 나름 친근한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4층 전시실을 들어서니 입구에서 싱그러운 자연들판에 자리한 동자석이 반긴다. 어두운 전시실과는 다른 밝음에 한참을 바라보다 쇳대박물관 전시실 내부로 눈길을 돌린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니 은입사 자물쇠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은입사 자물쇠는 자물쇠 표면에 은선으로 문양을 장식한 자물쇠이다. 세월의 흔적 탓인지 은선은 제 빛을 내지 못하고
지난 여행에 이어 오늘도 해미읍성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해미읍성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읍성으로도 유명하지만 성지순례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2014년 프렌치스코 교황이 다녀감으로써 그 유명세를 확인할 수 있었다. 해미읍성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에서 수많은 순교자들의 피로 물든 땅으로 ‘천주교 박해’의 현장이 되었던 곳이다. 해미가 있는 내포지역은 충청도에서 선진문물이 가장 빨리 전파되는 곳이었다. 18세기말 천주교가 유입되면서 이 지역에는 많은 천주교인들이 생겨났다. 하지만 쇄국정책을 단행했던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인들을 박해했는데, 이 천주교박해를 통해 해미지역에서는 1천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당하게 된다. 그 역사의 산증인이자 박해의 중심에 서게 된 나무가 바로 해미읍성의 호야나무이다. 호야나무는 해미읍성 옥사 앞에 자리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이곳 해미영에 끌려와서 감옥에 갇히고 더러는 이 호야나무에 묶여 고문을 당하고 목매달려 죽기도 했다. 김대건 신부도 이 나무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호야나무 동쪽으로 뻗은 가지에는 당시의 철사줄 흔적이 남아 있다고 하나, 육안으로 찾아보기는 어렵다. 호야나무 앞으로 자리한 옥사로 발길을 재촉해 보자. 이 옥사는
얼마 전 사진전에서 반가운 사진을 하나 만났다. 성곽과 초가지붕이 무척이나 잘 어울리는 작품이었다. 사진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사진 속 문화유산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늘은 그 날 빠져들었던 그 곳, 해미읍성으로 여행을 떠나보자. 서산에 위치해 있는 해미읍성은 전남 순천의 낙안읍성, 전북 고창의 고창읍성과 함께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3대 읍성이다. 읍성은 성 안에 관아와 민가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관아와 민가를 둘러싸고 성곽이 둘러싸여 있어 외부의 침입에 대비했다. 1천800m의 성곽으로 둘러싸여있는 해미읍성은 주출입구인 진남문과 성 중심을 두고 좌우에 동문인 잠양루, 서문인 지성루가 위치해 있다. 성내에는 활터를 포함해 민속가옥과 동헌, 내아, 청허정 등의 건물이 위치해 있다. ‘해미’라는 이름은 정해현과 여미현 두 개의 현을 병합하면서 각각 한 자씩 따서 지은 이름이다. 성종 22년에 완성된 해미읍성은 효종 2년에 청주로 옮겨질 때까지 230여 년 간 서해안 방어의 군사요충지였다. 그럼 해미읍성의 정문 진남문을 통해 해미읍성으로 들어가보자. 진남문을 통과하기 전 눈여겨보고 갈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문 앞에 세워진 두 기의 비석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군데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