탯줄부터 돈다 /나숙자 나를 찾기 위해 아라한의 둘레를 돌고 돌고 공감, 사랑, 화, 슬픔 속 나는 어디 있는가 오백 년 만에 빛을 안는다 짠하다 목이 잘린 고통 팔이 잘린 시간 그 모든 것이 화엄의 세계라고 순간순간을 미소로 말하는 그들 오백 아라한 내 미소는 어떤 걸까 나를 볼 수 없어 탯줄부터 돈다. ■ 나숙자 1951년 전남 나주출생. 문예사조로 등단해, 시집 <작은 자유를 위하여)>을 출간했다.영랑문학상을 수상했고, 국제PEN한국본부 이사를 맡고 있다.
참, 미안했습니다 /노영임 어머! 곱기도 해라 생화일까, 조화일까? 우린 서로 곁눈질로 슬쩍 눈빛 건네고는 꽃 한 잎 보드란 살점 손톱으로 짓이겼죠 아아, 그런데 그건 살아있는 꽃이었습니다 사랑초 붉은 핏물 배어나는 걸 보고야 기어이 상처내고야 살아있단 걸 알다니요 ■ 노영임 1963년 충북 진천 출생.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돼 제1회 현대 충청 신진예술인 선정, 한국시조시인협회 신인상 수상, 충북여성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조집 『여자의 서랍』, 『한 번쯤, 한 번쯤은』을 출간했다.
동백꽃 질 무렵 /권영해 청춘, 일시에 너무 서둘러 지나가 버렸으니 열정만 있었는지 굴욕도 많았는지 고뇌는 없었는지 붉게 그을린 세월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 비디오 판독VAR을 정중히 요청합니다 ■ 권영해 1958년 경북 예천 출생. 1997년 ≪현대시문학≫에 김춘수 시인 추천으로 등단해 울산시인협회·문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시집 『유월에 대파 꽃을 따다(2001)』, 『봄은 경력사원(2013)』, 『고래에게는 터미널이 없다(2019)』을 출판했고, 청운고에서 재직 중이다.
아내 /고원 아내가 이제 나를 안내한다 안아서 나를 안내한다 아내가 앞에서 나를 안내한다 아내가 나를 알아가며 아내가 인내한다 아 나의 서글픈 아내여 아나서, 그곳까지 아 내가 나를 인도할 때까지 ■ 고원 1951년 전주 출생. 1988년 시집 <한글나라>으로 등단해 1996년부터 2017년까지 서울대 인문대 교수를 역임했다.
메자르 /한영숙 산 넘고 또 넘어 어귀에 들어서자 어김없이 mezar 몇 기 눈에 들어온다. 그곳엔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텃새 평화로이 지절대는 곳. 곧 낮이 밤 되고 밤이 낮 되는, 산 자와 더불어 한가로이 술래인 척 제비뽑기 하는 터키의 소박한 영혼들. ■ 한영숙 2004년에 『문학선』으로 등단해 시집 『푸른 눈』 등을 냈고, 2014년 『발견』으로 작품상을 수상했다.
불규칙 활용 /권혁재 자음 ㄱ으로 미수를 건너온 서천댁 삼열씨 ㄱ의 순리와 말씀으로 불규칙을 새겨들은 서삼열 권사 어쩌다 다른 자음으로 활용하고 싶어도 골화된 요추받침을 지팡이 삼아 ㄱ으로만 걸은 삼열씨 죽음에 들어서야 모음 ㅣ로 반듯하게 편다 자음 ㄱ에서 모음 ㅣ를 최후 자세로 활용한 서삼열씨 ㄱ의 불규칙을 버리고 ㅣ의 규칙으로 관에 누운 서삼열 어머니 굽은 ㄱ이 ㅣ의 어미 활용을 한다. ■ 권혁재 1965년 경기도 평택 출생. 2004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해 단국대학교대학원 문예창작학 박사 졸업했다. 시집으로는 『투명인간』 『안경을 흘리다』 외 다수 출판했다.
얼음꽃 /권순자 바람결에 맴돌다가 당신이라는 매끄러운 표면에 얼어붙은 나의 운명 당신에게 하얗게 엉겨 꽃이 되었네 죽도록 붙어서 짧은 인연 애달파라 녹아내리며 매달려 애달픈 사랑 기다려줘 작은 알갱이로 잠깐만 빛날게 빛이 당신과 나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네 야멸찬 빛 당신은 나를 주워 담을 수 없어서 우네 빛이 나를 데리고 가네 미끄러운 절벽을 견디는 비밀은 빛이 뒤돌아보는 순간 내가 투명하게 생을 멈춘다는 것 당신은 햇살에서 나의 냄새를 맡는다는 것. 아, 나는 녹지 않는 사랑이 되고 싶었네. ■ 권순자 1958년 경주 출생. 1986년 《포항문학》에 「사루비아」외 2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해 《심상》으로 신인상, 동서커피문학상, 시흥문학상, 아르코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우목횟집』, 『검은 늪』,『낭만적인 악수』, 『붉은 꽃에 대한 명상』, 『순례자』, 『천개의 눈물』 3권, 『청춘 고래』 등이 있고, 시선집 『애인이 기다리는 저녁』, 『Mother's Dawn』(『검은 늪』영역시집)을 출판했다. 최근에는 수필집 『사랑해요 고등어 씨』를 출간했으며, 한국시인협회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난蘭 /문혜관 얼마나 아프기에 저리 날을 세우나 안으로 삼긴 인고 가슴 속 담아 놨다, 살 찢어 피는 꽃이라 향기조차 그윽한가 ■ 문혜관 1957년 전남 함평 출생. 1989년 《시조문학》으로 등단해 시집은 『번뇌, 그리고 꽃』 『찻잔에 선운사 동백꽃 피어나고』 『서울의 두타행자』 『난蘭』 등이 있다. 현재 통일문학관 관장, 계간 《불교문예》 발행인 겸 주간을 맡고 있다.
대관람차 /김태경 지지 않는 해바라기 하늘 가득 피었어요 뭇사람들 표정 담아 꽃잎 끝에 매달아 두고 서두를 필요는 없죠 제자리로 돌아오니까 꼭대기에 올라가서 지는 석양을 보았어요 석양을 가로지르는 뜨거운 새 한 마리 모든 게 제자리는 아니죠 마른 생이 지폈으니 매일 오는 12시여도 어제와는 다르죠 밤에는 멈춰 서서 남몰래 깊어지나요? 꽃잎은 꽃눈을 빚고 새날을 마중하네요 ■ 김태경 1980년 서울출생으로 2014년 《열린시학》 평론에 등단해 201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됐다.
눈 내릴 때의 기도 /전근표 눈이 온다 눈이 온다 검은 떼 덮어주고 찌든 떼 씻겨 주려나 보다 소리 없이 사푼사푼 하늘하늘 춤을 추며 온 천지가 하얗게 소복소복 너와 내가 좋아 하고 멍멍이도 좋아라 꼬리치는 눈이 오고 있다 하얀 세상 만들려나 보다 세상은 온통 잡동상이 부익부 빈익빈 비리부정 아직도 노약자 실업자 천지다 눈이라도 많이 쌓여라 가난한자들의 아픔과 슬픔 매만질 수 있다면 그래도 포근한 하얀 세상이 오겠지 우리 모두 하얀 세상위해 두 손 모아 기도를 하자 기도를… ■ 전근표 1949년 전북 진안출생. 육군중령 예편, 진안문인협회 제6대 회장을 역임했고, 한국시문학대상, 진안군 애향장, 고도금마 문화의장, 진안예술상, 전북문협 공로상을 수상했다. 표현문학회, 한국문인협회 회원, 우리말 가꾸기 위원회, 진안문인협회 고문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