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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히로히토에게 면죄부는 없다

태어날 때부터 전제군주 교육·태평양전쟁 주도…
日 근대 서막 메이지천황의 손자
亞패권 재패 우익의 기대 ‘한몸에’

히로히토 평전, 근대 일본의 형성

허버트 빅스 글|오현숙 옮김 /삼인|944쪽|3만5천원.

124대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 1901~1989). 그는 1926년부터 집권해 제2차 세계대전을 체험했고,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후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인물이다.

근대 일본은 메이지 천황이 쇼군 휘하 막부의 손에 있던 권력을 장악했을 때부터 시작됐다. 메이지 천황 집권기에 만들어진 메이지 헌법은 정치와 군사를 장악한 전제군주로서 천황의 지위를 보장했다.

20세기에 접어들어 제국주의로 발전한 일본의 잔혹한 역사를 그렇게 기반을 닦은 것. 메이지 천황의 아들 요시히토(嘉仁, 1912~1926)는 병약한 인물이라 주변에서는 천황에 대한 회의의 눈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후 요시히토의 아들이자 메이지의 손자인 히로히토는 강한 천황의 부활이라는 일본 우익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그는 어린시절부터 엄격한 군대식 교육을 받았으며, 아시아 패권 재패를 노리던 우익 군부의 영향 속에서 자라났다. 이후 각종 정책과 군사 전술에 깊숙이 관여했고,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달할 무렵에는 군사 지도자로서 자신의 위치를 분명히 했다.

하지만 전황이 일본에 불리해지자 독가스 등 화학무기 사용을 재가했고, 중국 몇몇 도시에 대한 무자비한 대인 공격을 허락하는 등 무리수를 뒀다. 패전을 앞두고 그가 걱정한 것은 신하나 백성, 나라의 제도나 정치체제가 아니라 바로 황조황종의 후손인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천황은 전쟁 책임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자신의 책임은 없으며, 종전의 공이 자신에게 있다고 강조했다. 게다가 종전 직후 일본 진보세력에 의해 표면화되는 듯했던 전쟁 책임론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져버렸다.

‘히로히토 평전, 근대 일본의 형성’에서는 저자이자 역사학자인 허버트 빅스는 30년에 걸쳐 일본 근·현대사에 대해 저술하고, 미·일 양국에서 일본사를 강의해왔다.

2001년까지 일본 히토쓰바시 대학교 대학원에서 교수까지 역임한 허버트 빅스 빙햄튼 대학교 교수는 이 책을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집필했다. 그는 히로히토가 태어날 때부터 전제군주로 길러졌고, 태평양전쟁에서 누구보다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전쟁 책임 문제에서 결코 면죄부를 받을 입장이 아님을 적나라하게 밝힌다.

2001년도 퓰리처(논픽션 부문)상을 수상한 이 책은 일본과 미국, 심지어 한국정부까지 공개적으로 문제 삼지 않는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론이라는 문제를 전격적으로 다뤄 큰 화제를 모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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