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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인물] 이한주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조작된 시국사건 ‘오송회’ 무죄 판결로 사법부 국민신뢰 이끌다
기업경영 투명성과 기업 사유화 방지 위해 그룹회장 법정구속
“인간 존엄성 인간이 다룰 문제 아니다” 사형제도 폐지 한 목소리


글 l 안병현 편집장 abh@kgnews.co.kr
사진 l 최우창 기자 smicer@kgnews.co.kr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1982년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암울한 시절이었다. 그 무렵 한권의 시집이 발단이 되었다. 1948년에 월북한 시인 오장환의 네 번째 시집 ‘병든 서울’은 당시 국어교사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이었다. 당시 공안경찰은 불온서적으로 분류된 김지하의 ‘오적’과 월북작가의 이 시집을 소유한 교사들을 뒤쫓기 시작했다.

1982년 11월 군산제일고등학교 교사들이 전주 대공분실 지하실로 연행된다. 인상이 험악한 ‘기술자’로부터 육신과 영혼이 갈가리 찢기는 고문이 자행됐다. 통닭고문, 전기고문, 물고문을 무려 40일간이나 반복하여 받았다. 그들이 결백을 주장하면 할수록, 그때마다 고문의 강도는 높아갔다. 대공분실은 다섯명의 교사가 소나무 아래서 손을 포개어 놓고 맹서를 하며 ‘오송회’(五松會)라는 명칭의 반국가 단체를 조직하고 강령을 채택했다고 만들어냈다. 조작이었다.

이 사건은 1심에서 9명의 피고인 중 3명이 실형을, 그리고 나머지 6명은 선고유예로 석방되었다. 그러나 광주고법의 2심은 선고유예로 석방되었던 6명마저 법정구속하면서 전원에 실형을 선고했다. 법정이 온통 아비규환이 된 것은 물론이었다. 이때 대법원도 형을 그대로 확정했다. 사건은 이렇게 조작되었고 법정도 거들고 나섰다.

이 사건은 이렇게 묻히는 줄 알았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고 2007년 6월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전형적 용공조작 사건으로 규정, 법원에 재심을 청구해 2008년 11월 무죄판결을 받았다. 당시 무죄판결을 냈던 광주고법 형사1부(이한주 부장판사)는 “당시 검찰과 경찰의 조서는 고문·협박·회유에 의한 것으로 증거 능력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 했다. 당시 이 판사는 “‘법원에서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느꼈을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 고통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동안 고통에 대해 옛 법원을 대신해 머리 숙여 사죄드리며 이 사건을 계기로 재판부는 좌로도, 우로도 흐르지 않는 보편적 정의를 추구 하겠다”고 법원의 이례적 반성을 보여줬다.

이 판결은 ‘거짓과 진실이 뒤바뀐’ 한국법조계의 영욕의 세월을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특히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부 시절 남북 대치를 빌미로 정권에 적대적인 진영의 인사들을 숙청하기 위해 조작된 용공 사건들의 실체가 허물 벗기듯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판사의 판결은 시국사건 피해자에 대한 국가보상으로 이어져 공권력에 의한 인권침해와 명예회복의 길을 터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 판사는 현재 서울고등법원 민사7부 부장판사로 재직중이다. 그를 찾아 간 날은 무더위가 막바지 기승을 부리던 9월 하순. 이 판사는 요즘 좋든 싫든 전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뉴스의 인물이 되어 있었다.

 

 

- ‘디워’ 라스트 갓파더‘를 제작한 영구아트 심형래 대표가 요즘 화제인데요.

“최근 판결에서 심 대표가 패소한 것을 말하시는 거군요. 우리영화를 세계 영화의 중심지인 미국에 소개한 심형래씨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은 아쉬운 점이 많게 됐습니다. 지난달 판결을 하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 판결에 고심한 흔적이 보이는데요.

“이 사건은 피의자인 현대스위스저축은행이 영구아트와 심형래씨를 상대로 낸 대출금 반환청구소송에서 ‘은행이 영화 제작에 50억원을 투자했으며 PF대출은 투자 사실을 금융감독당국에 숨기기 위한 허위 계약이다’라는 심씨 측의 주장을 받아들여 1심재판부는 ‘은행에 계약 일부에 대한 이자 1천900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내용이지만 저의 재판부는 그렇게 보지 않았습니다”

- 재판에 정상참작이란게 있지는 않습니까. 이를테면 심형래씨의 영화 세계화 업적이라든가.

“민사재판은 증거에 의해 사실을 확정하고 법률을 해석ㆍ적용하여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 사건은 사실확정의 문제에 있어 투자로 볼 수 있는 계약서와 대출로 볼 수 있는 계약서가 모두 존재합니다. 당사자가 어느 문서를 진정한 문서로 작성한 것인지 판단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쌍방에 별도의 재판기일을 열어 프리젠테이션 방식의 구두변론을 시켰습니다. 그랬는데 심형래 측에서 최종적으로 마이너스 대출통장을 개설한 이유에 대해 답변을 못했습니다. 그것이 결정적으로 심형래 측이 패소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피고 영구아트는 은행에 25억5천여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한 것입니다. 심형래씨의 영화 세계화 업적은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심씨 측이 항소심 판결에 불복해 상고하면서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중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심형래씨가 직원들에게 봉급도 제대로 주지 못하는 악덕업주로 전락하고 말았는데요.

“안타깝습니다”

이한주 부장판사는 1956년 안성 태생이다. 안성에서 초등학교와 안성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서울대 재학시절 공부는 뒤로 한 채 시국과 사회모순에 고뇌하였고 그때 국가와 국민사이에서 지식인이 고민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그러나 현실은 그게 아니었다. 4학년이 되자 법대 친구들 수 명이 사법고시에 합격했다. 그 때 받은 충격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 판사는 그날로 머리를 삭발하고 사법시험에 매진했다. 안성 촌놈에게도 기회는 찾아왔다. 군 복무 6개월을 포한 한 3년만에 우수한 성적으로 83년 사법시험에 합격한 것이다. 84년 사법연수원 15기로 판사의 길로 들어섰다. 판사의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이라고 생각했다.

지난 1986년 춘천지방법원 초임판사 임명을 시작으로 그의 법조인 생활이 시작됐다. 그는 지금 25년 판사생활의 꽃 서울고등법원 민사7부 부장판사로 일하고 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있던 2006년의 일이다. 당시 이 판사는 형사심리절차연구위원회 회장일을 맡아 공판중심주의적 재판운영을 하면서 이에 관한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당시 발표한 ‘공판중심주의 구현 - 일본 독일 실무참조’를 법원 게시판 ‘코트넷’에 올린 것이 화제가 됐다. 당시 이용훈 대법원장이 직접 전화를 걸어온 것이다.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이 원장은 전화에서 “글 잘 썼고 잘 읽었다. 다른 판사들에게도 공판중심주의 운영에 관한 전도사가 되어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고 한다.

서울남부지방법원 재직시절인 지난 2005년 11월 서울남부지방법원 판사 15명, 일반직 5명 등 20명을 대동하고 일본 동경지재 민·형사 법정 시찰 및 일본 판사들 및 일반직들과 간담회를 갖고 와세다대학으로부터 2회에 걸쳐 지적재산권영역 데이터베이스 관련 국제심포지엄에 참석해 토론과 발표회를 가졌다. 이 판사는 일본과 인연이 많다. 그래서 일본어 회화는 대화가 자유롭게 가능할 정도다. NHK를 즐겨 시청할 정도다. 일본어 일상회화가 가능해 뉴스, 토론프로를 즐겨 보고 있다.

- 판사님이 보유하고 있는 기록이 있다면서요.

“제가 사법부 차관급 이상 공무원 가운데 재산이 꼴찌입니다. 2008년 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로 부임하면서 재산공개대상 사법부 고등법원 부장판사 중에서 공개재산이 1억6천만원으로 최하위 기록을 갖고 있습니다”

- 지금도 그 재산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나요.

“현재 재산이 2억 7천 정도 될거예요. 잘은 모르지만... 재산이 다소 늘어난 것은 22평형 공시지가 3억2천만원짜리 아파트를 4억9천만원에 팔아 전세 3억2천만원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는 최하위를 조금 벗어나 꼴찌에서 2~3위는 될 겁니다”

- 집안 살림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신가 봅니다.

“집안 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공직자 재산신고도 처와 여직원이 정리해서 제출했지요. 밥먹듯 야근하고 주말이면 종종 기록 검토를 위해 한보따리 사건기록을 들고 집에 들어가면 듣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힘들면 이제 법원 판사생활을 그만두라고...”

- 그럴 때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솔직히 말해서 지금 판사를 그만두거나 아니면 정년 퇴직 후에라도 변호사를 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이 부분 또한 경제적 여건을 감안한다면 가족과 상의해야 할 일입니다만... 어느 정도 경제적 여건이 성숙이 된다면 빈곤층이나 사회적 약자를 위해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봉사하고 싶은 생각입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로스쿨에서 강의하고 싶은 생각도 갖고 있습니다”

 

 

- 힘들고 어려운 판사생활을 고집하는 이유가 따로 있나요.

“글쌔요 어려운 얘기지만 정의실현? 저는 정의라는 개념을 놓고 가끔 고민을 하기도 합니다. 정의란 개인, 집단, 국가, 국제사회 등 입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수많은 철학자가 정의를 말 했지만 정의를 한마디로 무엇이라 말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주제넘는 얘기지만 궂이 법관으로서 개인적 견해를 말해 보자면 ‘정의’란 ‘사람이 인간으로 누릴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삶의 실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법관의 ‘정의’도 통념적으로 크게 다른 것 같지는 않은데요.

“우리가 국가, 사회, 가족의 구성원으로 생활하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은 우리 헌법에 모두 규정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의 기본권 보장, 자유 민주적 기본질서의 유지, 법치주의가 그것입니다. 법관의 정의실현은 개개의 사건을 처리함에 있어 발생한 분쟁이나 사건의 실체가 무엇인지 진실을 발견하고 헌법정신에 입각해 법령을 해석 적용하여 올바른 판단을 이끌어 내는 것입니다. 아울러 1건 1건 내 가족의 분쟁이라 생각하고 사건을 신중에 신중을 기해 처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바로 법복을 벗어야지요”

- 판결은 시위를 떠난 활과도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건이 당사자의 생명, 재산권에 깊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신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판사는 ‘역지사지’ 즉, 원고, 피고인 당사자의 입장과 피해자, 국가·사회질서유지 측면 등 모든 면을 생각해서 판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건기록에만 연연하지 않고 정황증거를 다각도로 분석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새로운 것을 도출해내는 일이 중요합니다. 또한 헌법정신에 위배된 법률은 과감하게 헌법재판소에 위헌법률심사를 제청해야 합니다”

- 사법부의 기수 즉, 서열이 문제로 지적되기도 하는데요.

“사법부의 연수원 기수 문화를 완화하거나 파괴해야 법관의 관료화를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법부는 행정부처럼 관료화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법부 독립의 저해요인이기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법관이 정년까지 근무하는 풍토 조성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 기수문화가 능력있는 판사의 퇴진을 초래한다는 말씀이시군요.

“지금부터라도 바로 지방법원 부장판사에서 고등법원 부장판사(차관급)로의 사실상의 승진제도를 없애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판사들은 승진 신경 안쓰고 일하지만 인사권자의 눈치볼 여지를 아예 차단하자는 것입니다. 너무 연수원 기수와 서열에 억매이지 말고 능력이 있거나 적임자를 고등법원 부장판사에 보임하면 됩니다. 그렇게 되면 연수원 기수와 서열에 따라 인사가 결정될 경우 자기 차례가 지났다고 경력있고 훌륭한 판사임에도 조기퇴직해 결과적으로 국가손실을 초래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기수문화 파괴는 비단 고등법원 부장판사 승진제도에 국한된다고 보지는 않는데요.

“그렇습니다. 대법관 인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이 대법관에 연연하며 근무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현직 법원장들이 소신껏 법원을 이끌어 갈 수 있도록 변호사 중에서 선발하거나 아니면 연수원 기수에 따라 차례로 대법관을 임명하던 관행에서 탈피해 서열을 완화 내지 파괴하면 우수한 법관이 법정을 떠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봅니다”

- 대법관 수를 늘리는 것은 어떻습니까.

“좋은 방법의 하나입니다. 대법관 구성의 다양화 즉, 연령, 성별, 직업(법관, 변호사, 교수, 행정부 출신)별로 다양화 하고 현재 제도와 사건 부담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는 대법관 수를 늘려 국민의 권리구제기능을 제고시켜야 사법부가 신뢰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사형제도 폐지론자로 들었습니다.

“인간의 생명은 누구도 훼손할 수 없는 존엄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국가가 먼저 이를 인정해야 국민들도 따른다고 봅니다. 국가의 사형제도는 헌법원리에도 위배된다고 생각합니다.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하는 근거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중시해야 하는 측면과 재판이 오판의 소지를 안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사형 존치론자들이 범죄예방 효과를 거론하고 있지만 입증된 바 없습니다”

- 사형 대체형벌 판결을 내려 관심을 끌기도 했었지요.

“지난 2008년 광주고법 부장판사 시절 70대어부 연쇄살인사건의 피의자가 남녀 여행객 4명을 살해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됐는데 사형과 무기징역형 사이에 대체형벌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위헌법률심판을 제정한 바 있습니다. 사형제 폐지 논쟁에 불을 붙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 초임 판사시절 사형사건을 맡은 적도 있다면서요.

“1987년 춘천지방법원 발령을 받고 법관 2년차 되던때 사형사건 주심을 맞게 되었습니다. 사형선고를 처음 내린 순간 온몸이 저려옴을 느꼈습니다. 선고 순간 피고인의 강렬하면서 원망섞인 눈빛이 잊혀지지 않아 성당에 찾아가 고해했습니다. 눈물이 주루룩 흐르더군요. 그때 사형제도는 인간에게 너무 가혹한 형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 오송회 사건 판결은 ‘사법부의 사죄’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는데요.

“종전의 우리사법부는 군부 독재정권에 예속되거나 사법부의 독립이란 명분아래 독자적인 길을 걸어 온 것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지난날 잘못된 판결로 정의와 양심을 속였음에도 진실로 국민앞에 사죄하지 않았습니다. 언젠가는 사법부가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현재 우리 국가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면에서 민주적으로 환경이 바뀌었고 국민들의 의식도 높아졌습니다. 이와같은 상황을 감안하여 사법부의 독립을 철저히 지키면서도 사법부를 울타리안에 가두어 두지 않고 열린 자세로 국가발전, 국법질서 확립을 위해 검찰·국회·변협·언론 등과 언제나 대화와 협력을 통해 다른 기관과 유기적 공동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민의를 존중하며 국민속에 살아 움직이는 사법부가 되어야 합니다”

-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전관예우’ 있습니까.

“없습니다. 한 예를 들어 드릴게요. 그룹회장을 법정 구속한 적이 있습니다. 2007년 10월 서울중앙지방법원 부장판사로 있으면서 전 해태그룹 회장에 대해 집행유예 없이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을 했습니다. 당시 그룹회장의 변호사가 저와는 막역한 서울고등학교 선배였습니다. 그 선배 변호사는 저에게 구속만은 면케 해달라고 법정에서 부탁까지 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당시 저의 머리속에는 기업경영의 투명화를 유도하고 기업의 사유화를 방지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법정구속이 불가피 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후로 그 선배와는 서먹한 관계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선배에 대한 죄송스런 마음이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부장판사는 2명의 배석판사와의 대화를 가장 존중한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그들과 청사 뒤편 야산을 걸으며 격의 없는 대화를 이끌어 낸다. 가정사에서부터 시작된 대화는 사건으로 옮겨간다. 판결을 앞두고는 결론을 도출하기 위해 열띤 토의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 판사는 법조 후배이기도 한 두 배석판사에게 ‘법원리’와 ‘법철학’을 강조한다.

박정규 배석판사는 “부장님은 사건기록의 정확한 파악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것을 바라보는 혜안이 필요하다고 늘 강조하십니다. 기계적인 판단에서 벗어나 사건 하나를 하더라도 법의 기본원리, 법철학을 통해 사건을 바라보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늘 강조하십니다”고 말했다.

이한주 부장판사는

△1956년 경기도 안성출생. 안성중학교 졸업

△1975년 서울고등학교 졸업

△1980년 서울대학교 법대 졸업

△1984년 사법연수원 15기

△1986년 춘천지방법원 판사

△1990년 수원지방법원 판사

△1997년 대전지방법원 공주지원장

△2001년 청주지방법원 부장판사

△2008년 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차관급)

△2009년 광주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고법 부장판사)

△2009년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현)

이한주 법관의 명판결들

▲오송회 간첩조작사건 무죄판결과 대국민 ‘사죄’

광주고법 형사1부 부장판사 재직시절인 2008년 경찰의 불법 연행과 감금, 수사관들의 구타와 고문이 허위자백을 낳았고 검찰에서도 강압적 분위기가 계속된 점을 인정하고 자본주의에 대한 모순과 잘못된 정치상황에 대한 과잉비판이 반국가단체와 이적행위로 포장된 점일 인정해 무죄가 선고됐다.

20여분간 공소사실의 증거부족을 성명한 뒤 이 부장판사는 “재판부 내 3인의 법관은 한치의 이견없이 무죄를 선고한다”고 말했다. 무려 26년동안 피고인들을 짓눌러 온 간첩의 굴레를 벗었다. 이어 이 부장판사는 “법원에 가면 진실이 밝혀지겠지 하는 기대감이 무너졌을 때 여러분이 느꼈을 좌절감과 사법부에 대한 원망, 억울한 옥살이로 인한 심적고통 등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며 “그동안의 고통에 대해 법원을 대신해 머리숙여 사죄드린다” 고 했다.

피고인들이 서로를 껴안고 만세를 부른 것은 무죄선고 보다도 이 부장판사의 ‘사죄’였다. 이 판결은 ‘진실·화훼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잘못된 과거청산차원에서 시작돼 공안정국에서 수없이 조작된 간첩사건에 대한 무죄판결의 기폭제가 되었다.

▲사형과 무기징역 사이 대체형벌의 필요성

이 부장판사가 광주고법 형사1부 부장판사로 재직중이던 2008년 사형제도 폐지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70대 어부 연쇄살인’ 사건 항소심을 맡아 남녀 여행객 4명을 살해한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이 선고된 어부 오모씨 변호인의 신청을 받아들여 사형과 무기징역형 사이에 대체형벌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사형제에 대해서는 그동안 수차례의 헌법소원이 있었지만 법원이 직접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에 대해 판사들은 “놀라운 결단”이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 당시만 해도 사형제 폐지에 대해 민간인이 낸 헌법소원은 두차례 있었지만 판사가 위헌법률심판 제청을 하기는 처음이었다. 이러한 점이 이 판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룹회장 실형선고와 법정구속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 부장판사로 있던 지난 2007년 거액의 공금을 빼돌려 개인적으로 유용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전 해태그룹 회장에 대해 징역 1년6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했다.

이 부장판사는 판결문에서 “피고인은 문제의 돈이 회사로부터 정상적으로 빌리거나 고문료 명목으로 받은 정당한 돈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증인들의 진술 등에 따르면 개인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6개 피해회사로부터 대규모 자금을 인출한 만큼 횡령죄가 성립한다”고 밝혔다. 이 판결은 기업경영의 투명화 유도와 기업의 사유화 방지를 위해 엄벌을 내린 재판으로 기업들에게 경각심을 불어넣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시 그룹회장을 변호하던 변호사가 이 부장판사가 고등학교 선후배 사이로 막역했다는 점에서 실형선고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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