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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계절을 바꾸다

 

가을이 서둘러 행장을 꾸린다. 풀들은 파삭해졌고 영근 씨앗들 옮기느라 바람은 동분서주다. 은행나무 아래 서면 노란 잎보다 먼저 쏟아지는 것이 그리움이다. 묵정의 가지에서 파릇한 새 순 꺼내며 입덧을 시작하다가 한눈 잠깐 팔다보면 짙푸른 잎들 사이사이 은행을 주렁주렁 매달더니 이내 노란 옷으로 갈아입는다.

노란 비가 하루 종일 내렸다. 옷깃으로 스미는 한기를 따끈한 차 한 잔으로 여며보지만 옆구리는 여전히 허전하다.

집으로 돌아와 장롱을 열었다. 며칠 째 미루던 옷장정리를 하기 위해서다. 정리라기보다는 옷을 바꾸기 위해서다. 간절기 옷들을 개켜 서랍에 넣고 털스웨터며 기모바지 등 두툼한 옷을 주섬주섬 꺼내 놓는다. 막상 입으려고 하면 마땅찮은 옷이 왜 이리도 많은지 수북하다.

안 입는 옷가지는 과감하게 버리자고 다짐했지만 두어 가지 골라내고는 또 망설인다. 몇 년 째 자리만 차지하던 옷도 집어 들고 보면 이런저런 사연이 있고 추억이 있어 차마 버릴 수 없어 또 보관하게 된다.

어떤 옷은 아들이 첫 월급으로 사준 거라 못 버리고 어떤 옷은 몇 번 입지 않은 새 옷이라 아까워서 안 되고 이렇게 쌓아둔 옷이 옷장 가득하다. 옷을 잘 입는 사람은 적은 옷으로도 코디를 잘 해서 늘 멋쟁이처럼 하고 다닌다는데 있는 옷도 제대로 못 챙겨 입고 계절이 바뀌면 그제야 아쉬워한다.

무엇보다 다이어트로 체중을 10㎏ 정도 감량한 적이 있는데 그때 새롭게 장만한 옷이 문제다. 처음 일이년은 관리를 잘 하다가 방심한 틈을 타 체중이 원래대로 돌아와 버리는 바람에 작아서 못 입는 옷이 많아졌다. 버리기는 아깝고 언젠가는 다시 체중을 줄이겠다는 욕심과 기대로 보관하다보니 양이 많다.

어디 그 뿐인가. 유행이 바뀐다며 철마다 옷을 사들이는 딸아이 옷도 한 몫 한다. 아직 멀쩡한 새 옷을 버린다고 꺼내놓으면 딸아이 몰래 주섬주섬 챙겨 내 옷장으로 가져온다. 바지는 기장과 허리가 안 맞아서 입을 수 없지만 웬만한 티셔츠나 스웨터는 대충 입으면 되니까 또 욕심을 낸다. 사주는 옷이나 제대로 입으라고 핀잔을 들으면서도 쌓고 또 쌓는다.

백화점이나 아울렛에서 행사제품을 보면 또 손이 간다. 사지 말고 있는 옷이나 입어야지 하면서도 어느새 뒤적이게 된다. 가격이 착해서 오늘이 아니면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에 집어 든다. 집으로 오는 동안은 돈을 쓰고도 돈을 번듯한 기분으로 즐겁지만 꼭 필요로 해서 구매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입지 않고 옷걸이만 차지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성격 때문인가. 미련 때문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결국 있던 옷 다 옷장에 집어넣는다. 버리는 것은 언제든 할 수 있지만 혹시 필요하게 되면 후회할 것 같아서다. 옷장 정리하며 은행나무를 생각한다. 빼곡하게 열렸던 은행 다 버리고 마지막 잎까지 떨어내면서 빈 가지로 겨울을 준비하는 은행나무, 봄부터 가을까지 잎과 열매를 위해 온 힘을 쏟은 나무에게 뿌리로 깊어지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일까.

철마다 옷을 갈아입고 또 새 옷을 준비하고 어느 것 하나 비우는 일에 인색한 나는 자신에게는 얼마나 충실한지 반문해 본다. 계절을 갈아입으며 거리에 쌓인 낙엽의 두께만큼 옷장에 쌓아둔 옷의 무게가 새로운 계절을 여는 힘이 될지 생각해본다. 나이 먹을수록 욕심은 비우고 마음의 양식은 채우라는 말이 머릿속을 떠도는 가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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