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30 (화)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원수

/표규현

그 때 나는 일렁이는 촛불처럼 들떠 있었고 골목에는 흙바람이 불었다 몰래 한 수음처럼 부끄러웠고 언덕길을 오르는 리어카처럼 애만 탔던 것 같다 그 중에 어머니와 함께 들여다본 아궁이 불씨가 튀었고 마음이 뜨거웠고 산수유는 노랗게 꽃 피웠고 내 뜰에 열매 같은 시들 몇 개 맺힌 것 같다 그리고 아무런 일도 없었던 듯 세상에 어울리기도 하고 뒤척거리며 살아왔다

이제 늙은이의 무릎처럼 남은 기운이 얼마 남지 않은 듯 빈 술병처럼 뇌리에 남은 것이 없는 듯 갈라진 논처럼 용기도 말라버린 듯 버려진 커피처럼 정열도 식은 듯 찢긴 깃발처럼 무감각하게 걷고 죽어가는 개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는 듯하니 송곳으로 골을 찔러 밑바닥에 붙어 있는 의지를 파내야 할 듯하고 엉덩이에 불이라도 붙여 달리게 해야 할 듯하고 입에 풀무질을 해서 숨을 다시 쉬게 해야 할 듯하고 눈을 소금으로 비벼야 할 듯 하고 귀에 큰 바람 소리를 불어 넣어야 하겠고 뒤통수를 지게 작대기로 갈겨야 하겠다

누가 알랴, 내가 꿈꾸는 처음 보는 열매 같은 시들이 먼지 쌓인 담장 아래 이슬을 먹고 나온 민들레 싹처럼 자라날지 움츠린 허파를 팽팽하게 부풀리는 바람 같은 호흡으로 살아날지 삽과 곡괭이로 물길을 파 젖히면 갈라진 논밭에 활력이 살아날지

어쩌겠는가, 애태우는 자여! 밤을 지새우는 눈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창자를 긁어대는 불개미의 이빨은 따갑게 물어뜯어 혀를 말리우고 목을 태우는구나 밤을 잡아먹고 창자를 물어뜯고 앓는 소리를 먹고 자라는 이 작자는 나의 원수가 틀림없구나! - 웹진 ‘시인광장’ / 2018년 8월

 

 

 

 

스스로를 깊이 들여다보는 눈길이 느껴지는 시다. 10대에 알맞은 시가 있고 20대, 30대, 40대에 알맞은 시가 있다. 서양 시들은 웬만해서는 스스로를 들여다보는 시를 보기 힘들다. 그 영향으로 우리 시에서도 점점 스스로를 성찰하는 시들이 줄어들고 있다. 거울을 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까. 동양에서는 몇 천 년 동안 수신修身을 이야기했다. 불교에서도 진아眞我를 이야기한다. 촛불은 광화문의 촛불을 연상케도 한다. 정년퇴직 이후 스스로의 삶을 되돌아보며 ‘어쩌겠는가, 애태우는 자여!’ 외치는 시인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밤을 잡아먹고 창자를 물어뜯는 스스로의 모습에 아파한다. 그 아픔을 통해 시인이 꿈꾸는 처음 보는 열매 같은 시들이 먼지 쌓인 담장 아래 이슬을 먹고 나온 민들레 싹처럼 자라날 것을 믿게 한다.

/조길성 시인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