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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천경자의 ‘생태’와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

 

 

 

 

 

코로나19 바이러스와의 싸움이 장기전이 되고 있는 와중에 봄은 찾아왔다. 마른 가지에 돋은 눈이 새삼 강인하다고 느껴진다. 땅을 비집고 나오는 옅은 초록처럼 희망도, 우리 안의 생명력도 언제나처럼 고개를 들 것이다. 성큼 다가온 봄이 반가우면서도 마냥 즐거워할 수 없는 봄의 입구에서 문득 천경자의 작품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1951년 천경자는 <생태 生態>라는 작품을 발표함으로써 화단에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수십 마리의 뱀들이 뒤엉켜 꿈틀거리는 형상은 매우 독특하면서 신선했다. 게다가 이처럼 파격적인 주제와 구도의 작품이 여성 화가의 손에 의해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여성 화가들의 활동이 드물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화가는 뱀의 생생한 움직임을 그리기 위해 동네 시장의 뱀 장수를 매일 찾아가 한동안 뱀을 관찰했었다 한다. 각기 다른 색깔과 무늬를 지닌 뱀들이 구불거리며 뒤엉켜 있는 모습은 생명이 지닌 강인한 힘과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작품은 허구를 그린 것이 아니라 대상을 사실적으로 그린 것이지만, 관객들의 상상력을 크게 자극한다.

<생태>를 그렸을 당시 천경자 화백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고 한다. 험난한 시절 여성의 몸으로 화가라는 전문직에 몸을 담고 있는 것만으로도 크나큰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아버지 사업의 실패, 동생의 죽음, 첫 남편과의 결별을 겪었고, 미술 교사로 일하며 홀로 아이들을 양육하고 있었다. 게다가 두 번째로 사랑에 빠진 남자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화백은 먹을 쌀을 사기도 어려운 형편에 어렵사리 물감을 구해 작품 활동을 이어간다. 그러니 <생태>에 등장하는 강인한 힘은 어려움과 인내 속에서 솟아오르는 힘이었던 것이다. 그는 이 작품을 발표하고 화단에 ‘천경자’라는 이름을 확실하게 새겨 넣었다.

사실 대중들 사이에서 그는 화려한 색채로 이국을 그린 풍경화나 꽃과 함께 있는 여인의 모습을 그린 자화상으로 좀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들 채색화는 70~90년대 중년이 된 화백이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그린 그림이다. 1976년 작 <내 슬픈 전설의 49페이지>라는 작품에서는 아프리카의 이글거리는 태양의 색채가 매우 선명하게 드러난다. 마르고 키 큰 식물들이 출렁이고 있는 황금들판에는 코끼리, 기린, 사자, 여우와 같은 야생동물들이 몸을 낮추고 있다. 화면의 중앙에는 덩치가 큰 코끼리가 서 있고, 화가로 짐작되는 한 여인이 머리를 풀고 벗은 몸을 한 채 그 위에 웅크리고 있다. 황혼의 태양빛도 화려하고 색색의 동물들도 알록달록하건만 작품의 제목에도 등장하는 슬픔이 찬란하게 발산되고 있다.

화백은 화관을 쓰고 있거나 꽃을 들고 있는 자신의 모습도 즐겨 그렸다. 피부는 창백하고 두 눈동자는 동그랗게 확장되어 있으며 갈색이나 금빛의 머리칼은 길게 내려뜨리고 있다. 화가를 장식하고 있는 꽃들은 탐스러우며 화려하다. 자화상에 담긴 여인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화백은 ‘꽃과 여인을 그린 화가’로도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요즘 같은 봄철에는 다채로운 색감이 돋보이는 이들 작품들에 좀 더 눈길이 간다. 51년에 발표한 <생태>와는 전혀 다른 풍의 작품이지만 모두 천경자 만이 지닌 화려한 느낌이 담겨 있다. 그 화려함은 외로움과 역경 속에서 만개하는 화려함이며, 이는 천경자라는 화가가 지닌 독특한 감성이기도 했다. 아픔과 화려함을 동시에 드라마틱 하게 펼쳐내는 그의 화풍은 그를 대중적인 화가의 반열로 올려놓았다.

싱숭생숭한 시기에 천경자의 그림에 눈길을 보낸 이가 필자만은 아니었는지, 올해 열린 몇몇 옥션에서 천경자의 자화상이 높은 금액으로 낙찰되었다는 뉴스가 들려온다. 하지만 화가가 작고하기 전 자신의 작품을 공공에 기부한 덕분에 우리는 비싼 돈을 치르지 않고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그의 작품을 감상할 수가 있다. 신종 바이러스가 우리의 발길을 가로막지 않고 있다면 말이다. 누군가의 작품들을 찬찬히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계절이 가져다주는 힘과 생명을 우리 안에서 깨울 수 있다는 점이 참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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