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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향기] 감자 수프

 

햇감자가 생겼다. 감자하면 떠오르는 것이 <동백꽃>이다. 김유정의 단편 <동백꽃>에서 옆집 ‘점순이’가 ‘나’에게 내밀던 큼지막한 감자 세 알이 퍽이나 인상 깊었다. “느 집엔 이거 없지?”라며 감자를 내민 점순이의 손을 밀치던 ‘나’의 비참한 심정이 감자 알 만큼이나 크게 가슴에 들어찼기 때문이었다.

 

감자 요리를 그리 즐기지 않는다. 그래도 감자 수프는 좋아한다. 감자를 깎는 일은 좀 재미있다. 칼끝에서 돌돌 말리는 감자껍질은 나선으로 바닥에 떨어진다. 나선으로 꼬인 상념들도 감자 껍질 떨어지듯 툭 떨어진다면 좋겠다. 양파도 깐다. 감자 수프엔 양파가 들어가야 감칠맛이 난다.

 

이상하게도 수프는 비 오는 날 만들게 된다. 홈통에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스프를 만들면 마음은 차분하게 수프에 몰두한다, 깊은 냄비에 주걱을 넣어 바닥에 가라앉는 전분을 저으면서 비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낮은 소리에 집중한다. 그러다보면 수프는 다 만들어지고 집안에는 부드러운 감자 수프 냄새가 머문다.

 

감자 수프의 맛은 밋밋하다. 나처럼 싱거우면서도 묘하게 숟가락이 자주 간다. 특별한 맛은 아니지만 한 숟가락 입안에 넣으면 나른하고 따뜻하게 목을 넘어간다. 걸리는 것도 없이 따지는 것도 없이. 감자 분처럼 자분자분한 기억도 감돈다.

 

필리핀에서 먹었던 포테이토 수프가 생각난다. 파나이 섬 아래쪽 도시에 몇 달 머물 때다. 지내던 빌라 바로 옆엔 제이디 베이커리가 있었는데 식사도 할 수 있었다. 빵과 케이크 종류가 많았고 음료와 디저트도 다양했다. 아침이나 점심을 이곳에서 해결하는 사람이 많았고 나도 자주 갔다.

 

비 오는 날이면 수프를 주문했다. 수프와 함께 샌드위치나 도넛을 주문했다. 클럽샌드위치는 꽤 괜찮은 메뉴였다. 저렴한 가격에 비해 맛과 모양은 결코 싸지 않았다. 거기에 디저트는 또 얼마나 달콤했던가. 바나나를 튀겨서 만든 디저트나 오묘한 맛이 나는 갖가지 색깔의 음료수는 나를 달달하게 절여주었다.

 

그곳 감자 수프는 싸고 맛있었다. 나중에 한국에 돌아와서 그 감자수프가 생각나 만들었지만 그때 먹었던 맛이 나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해서 비슷하게 만들어냈지만 그 맛은 그곳에 가지 않는 한 절대로 만들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난 자꾸 그 맛을 더듬는다. 매년 햇감자가 나오면 수프를 만든다. 이젠 그 맛이 어떤 것인지 감감한데도.

 

맛이란 전혀 가늠할 수 없는 독특한 영역이리라. 같은 재료와 정확한 계량에도 요리한 사람과 먹는 사람에 따라, 조리도구와 먹는 환경에 따라 백 가지, 천 가지 다르다. 객관적인 기준도 모호하고 개인의 취향도 다른 것이 맛의 세계이다. 그 때의 기분에 따라 맛있는 음식이 되거나 끔찍한 음식이 되기도 한다.

 

음식은 멀어진 것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전에 먹었던 감자 수프를 불러오는 것은 그때의 생활이 편안하고 즐거웠기 때문이리라. 그리 유명한 곳도 멋진 곳도 아닌 작은 도시인데도 마음은 편했다. 식사 때가 되면 식당에 가서 먹으면 되고 빨래는 런드리 샵에 맡기면 되는 일상이었다. 책을 읽기도 하고 마사지를 받거나 수영장에서 수영을 했다. 그곳에서 나의 시간은 단순했지만 부드럽고 달콤했으며 천천히 흘렀다. 지금처럼 서두를 일이 없었다.

 

대충 씹고 넘기듯 쫒기는 일상이다. 맛있으리라고 예측한 일이 쓰디쓴 맛이 날 때가 있다. 단것을 먹어도 씁쓸하고 목으로 잘 넘어가지 않는 날처럼 누군가 넌지시 ‘잘 지내니?’ 라고 물으면 눈물이 날 것 같은 날도 있다.

 

그런 날 수프를 만든다. 감자를 벗기고 우유를 넣어 블렌더로 갈아주고 주걱으로 저어주면서 고민을 갈아내고 끓여 걸쭉하게 만든다.

 

예컨대 수프는 내가 나에게 떠먹여주는 회복식이다. 한 숟가락 입에 넣어주며 ‘너 괜찮니?’ 다시 한입 떠 넣으며 ‘넌 괜찮을 거야’ 또 한 번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넌 괜찮아’ 라고 토닥여주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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