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 평론가 달시 파켓은,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지난 30년간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평론 일과 저널리스트 일, 무엇보다 한국영화 자막 번역가 일을 해 오고 있다. 그는 솔직히 한국말보다는 한글을 아주 정교하게 쓰고 사용하는 미국인이다. 한국말은 약간 어눌한데(30년을 살았음에도!) 글을 쓰는 데 있어 마침표 하나, 따옴표 하나 불필요하게 사용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완벽하다. 그가 작업한 ‘기생충’ 영어 번역은 감독 봉준호가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무대에 서는 데까지 큰 역할을 한 셈이다.
그는 보스턴에서 태어났으며 국적은 미국으로 한국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서울 강북 어디메쯤에서 산다. 그 역시 아이들의 교육 문제를 놓고 고민하며 살아가는 한국 아버지, 여느 부모와 다를 게 없다. 나는 그에게 늘, 너의 아이들을 하루라도 빨리(근데 이미 늦었다.) 부모가 살고 있는 보스턴 외곽으로 보내라는 말을 하곤 한다. 한국에서의 입시가 다소 너무 강고(强固)하다고 생각하는 터라 미국인인 그마저 그걸 고스란히 떠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걸 한국에 살고 있는 미국인 특유의 특혜이자 특권이라고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고백하건대, 나는 아이를 10년 넘게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게 했다. 이런저런 가족의 사유야 그 누구든 대 서사시에 해당할 만큼 철철 넘치겠지만 아무튼 우연찮은 계기로 아이를 초등학교 5학년 때 뉴욕으로 보내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까지 마치게 했다. 이건 특혜일 수 있다. 남들 것을 뺏은 ‘약탈적’ 특혜는 아닐지언정, 어찌 됐든 남들이 얻을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기회를 갖게 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과 같이 초절정 경쟁사회에서라면 더욱 그렇다. 광범위한 의미의 특혜일 수 있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한다. 그래서 한 톨의 자격도 없고 또 다른 부적격 사유가 넘치지만 이거 하나만으로도 가장 낮은 공복의 역할, 최하위급이라도 공직의 생활은 평생을 마다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산다. 아이에게도 평범하고 겸손하게 사회생활을 해나가도록 가르침에 가르침을 거듭하고 있다.
아이들 교육문제에 대해 적어도 내가 가지려고 하는 기본적인 태도, 자세는 쉽게 남을 판단하고 재단하거나 비난하고 비판하지 말자는 것이다. 아이 문제에 대해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나 부모는 한국에 없다고 감히 생각하는 바이다. 법률적 원칙은 더더군다나 잘 모르는 영역이다. 아이들이 가혹한 입시의 등용문 과정을 거치는 경로에는 다양한 면이 있고 거기에는 정량적, 정성적 평가 외에 다양한 무엇, 관습적인 무엇이 작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것이 상궤(常軌)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라면 논란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주장이 시발(始發)로 작동하게 놔두면 안 될 일일 것이다. 자신만큼은 입 다물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한 ‘너 자신을 알라’의 철학이고 유교에서 무수하게 가르치는 겸양의 미덕일 것이다. 예수가 말한 대로 ‘죄 없는 자들만이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식의 영성의 가르침이다.
새 정부의 법무장관과 보건복지부 후보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자녀의 입시비리 문제의 원천은 바로 거기에서 찾아진다. 비난해서는 안될 사람들,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지난 시절 이른바 ‘조국 사태’에서 너무 쉽게 플래카드를 들고 피켓을 들었다. 그를 맹비난하고 그의 가족을 광기의 무덤에 파묻었다. 그 결과가 지금 현 정부의 조각(組閣)에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셈이다. 다른 걸 다 떠나서 참으로 면이 안 서게들 됐다. 이런저런 사례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다 얼굴이 화끈거린다. X 팔린다. 이러고도 당신들이 한 가족을 파탄 나게 했는가. 조국 딸에게만 연구 부정 판결을 내리고 서민 교수의 논문 등에 대해서는 면죄부를 준 단국대 교수들은 대체 어떤 변명을 하고 있는가.(오마이뉴스, 5월 13일 자 기사,『단국대, ‘조국 딸만 부정 판정, ‘서민 교수’ 등 17건 면죄부』) 국민대는 왜 김건희 논문에 대한 판단을 계속 보류하는가. 이게 대학이고 이게 교수의 자세인가. 그러면서 왜 비난하고 비판했는가.
그러니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장관 후보들은 깨끗이 스스로 물러날 일이다. 그리고 이제 입시비리와 관련된 사회적 논란은 이쯤 해서 정돈하는 게 맞을 것이다. 적절한 원칙과 기준도 어느 정도 공유되고 합의된 터이다. 그러니 좀 적당히들 했어야 옳았다. 지나쳤다. 왜 스스로들 지나쳤음을 인정하지 않는가. 논란이 되고 있는 후보들 중에 그에 대한 솔직한 반성을 내비치고 사과했다면 수습이 됐을 수도 있는 일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거니와 자녀의 문제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들이 한국에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영화감독 홍상수는 단 한 줄로도 한국의 정치나 한국의 사회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오히려 고도의 정치행위, 더욱더 적극적인 정치행위라고 생각한다. 단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한국 정치가 천박하고 구질구질하다며 빙글빙글 능멸하고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근데 세계가 좋아하는 홍상수의 영화들은 보고 살고 있을까, 그 수많은 장관 후보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