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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언제나 영화처럼] 참담한 러브 스토리가 우리에게 전하는 것

150. 차이콥스키의 아내-키릴 세레브렌니코프

 

우리에게는 아직 낯선 러시아 영화(이건 순전히 감독 이름과 배우 이름이 입에 쉽게 붙지 않아서인데 예컨대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같은 감독 이름은 도통 외워지지가 않는다.

 

Tchaikovsky도 그렇다. 차이코프스키인가 차이콥스키인가. 이것도 오랜 세월 영어교육 대미 의존도가 강했던 문화 탓이다.)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차이콥스키 얘기이긴 하지만 차이콥스키의 음악, 그러니까 그의 『백조의 호수』나 『비창』 같은 것은 나오지 않는다. 음악회나 연주회, 발레 장면도 이렇다 할 게 나오지 않는다.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완벽하게 그의 아내 얘기이다. 영화는, 차이콥스키의 성적 취향에 따라 철저하게 버림받고 처절하게 유린됐던 아내 니나(안토니나 밀류코바)의 얘기를 담는다. 총 143분 러닝타임 중 절반이 지난 82분쯤 그 이유가 나온다.

 

차이콥스키(오딘 런드 바이런)의 여동생인 사샤(바르바라 시미코바)는 올케 안토니나 밀류코바(알리오나 미하일로바)에게 자신의 오빠는 ‘부그르’라고 고백한다. 니나는 부그르가 뭐냐고 묻고, 잠시 머뭇거리던 사샤는 이렇게 말한다.

 

“오빠는 여자를 안 좋아해. 평생 여자를 좋아해 본 적이 없어. 오빠는 남자를 좋아해. 그것도 어린 남자 애를.” 차이콥스키가 동성애자이자 그것도 페도필(소아성애자)이라는 사실을 아내인 니나가 처음 인지하는 순간이다.

 

그리스 정교의 교리대로 순진하고 순수한 영혼으로 살아왔던 니나는 새로운 성(性)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영화는 이때부터 약 1시간 동안 급전직하의 절벽을 타고 넘기 시작한다. 니나, 곧 안토니나 밀류코바는 이후 원치 않는 남자와 성관계를 맺고 애를 세 번이나 갖는다.

 

애들은 다 고아원에 보냈으며, 그런 와중에  동시에 여러 명의 남자와도 관계를 맺는 그룹섹스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녀는 차이콥스키에게 복수하기 위해 절대로, 절대로 그와 이혼하지 않는다. 이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영화는 차이콥스키와 밀류코바가 처음 만난 1872년과 결혼을 했던 1876년, 그리고 둘이 헤어진 1877년과 그 이후 니나가 파국의 인생을 살았던 1917년까지의 삶을 다룬다. 그 사이인 1893년에는 ‘위대했던’ 음악가 차이콥스키는 콜레라로 세상을 뜬다.

 

영화의 인트로는 1893년 차이콥스키의 장례식이다. 니나는 그의 영안실에 마치 타인이 가듯이 조화를 들고 가는데 그전에 조화의 문구를 쓰느라 애를 먹는다. ‘가장 위대한’, ‘사랑하는 이에게’ 등의 어휘에서 헤매던 그녀는 이렇게 쓰기로 결정한다. ‘그를 추앙하던 그의 아내로부터’.

 

 

영화는 한 위대한 예술가와의 삶이란 것이 사랑인지 추앙인지, 아니면 그 사이에서 변질된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는 애증의 예술사이자 예술이 가져가야 할 진정한 가치, 사람들이 예술을 추앙하고 사랑하는 진정한 이유와 의미에 대해 묻는다. 어떤 게 진짜 사랑이냐고 묻는다.

 

그 과정, 2시간이 넘는 영화 시간 동안 사람들은 마치 심신이 짓이겨지는 듯한, 그래서 마치 도살자에게 다져지는 육고기가 되는 느낌을 받는다. 예술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저렇게 모든 것을 내던져야 하는 것인가.

 

소아성애자였던 차이콥스키가 자신의 성벽(性癖)을 감추기 위한 수단으로 한 여인의 일생을 저렇게까지 망가뜨려도 되는 것인가. 안토니나 밀류코바는 결국 차이콥스키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은 후 창녀(같은 존재)가 됐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니나의 극도의 결벽증 같은 스토킹, 곧 차이콥스키는 절대로 자신을 떠날 수 없다는, 오직 자신만이 그를 사랑해야 한다는 광기 어린 집착이 차이콥스키를 1년도 안 돼 지치게 만든 요소일 수도 있겠다.

 

니나의 사랑은 미친 것일 수도 있다. 사랑은 늘 광기와 정상 사이를 오가게 마련이다. 이 둘의 사랑은 따라서 둘의 무릎 맞춤의 진술이 필요한 것이며 어느 한쪽의 일방적 주장만으로 쉽게 재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두 사람 모두 비교적 정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며 사랑은 어쩌면 이 같은, 극히 비정상의 일상에서 잠깐 동안 반짝 타오르기 마련인데, 그걸 어떻게 자신들의 삶 속에서 정상적 궤도로 재 진입시켜 평생을 애정의 관계로 유지하고 살아가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에 예술적 교감이라는 또 하나의 층위가 생기면 얘기는 좀 더 복잡해진다. 예술가들, 특히 음악가들은 종종 자신의 작품을 위해 사랑 따위는 중요하지 않거나, 사랑이 아닌, 보다 변칙의 삶이 필요하다는 이기주의에 휩싸이게 된다.

 

한 명의 예술가를 탄생시키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축적돼야 한다. 그것 참 이상한 법칙이지만 대중들은 종종 예술을 위해 그 기이한 룰을 받아들이곤 한다. 지금도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무덤에 던져 버리는 사람은 없다.

 

그건 마치 영화계에서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 ‘차이나타운’이나 ‘로즈메리 베이비’를 여전히 애호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다. 로만 폴란스키는 아동 성폭행 범죄를 12건이나 저질러 유럽에서 도피생활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872년~1917년은 러시아가 혁명으로 들끓던 시기이다. 특히 1872년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48년 칼 마르크스와 함께 쓴 '공산당 선언'을 '공산주의 선언'으로 바꿔 출판해 대중적 선동의 기치를 내세운 해였다.

 

미하일 바쿠닌이 이끄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들이 부패한 러시아 귀족사회인 로마노프 왕조를 연일 공격하던 시기였고 피폐한 민중의 삶은 급속도로 추락하던 때였다. 한편에서는 지식인들 그룹인 나로드니키(인민주의자)들이 민중을 의식화시켜 제정 말기를 붕괴시키려 애쓰던 때였다.

 

차이콥스키는 이런 시기에 음악을 만들었으며 이런 시대에 소아성애에 집착했고 한 여인의 순종적 사랑을 받는 것을 거부했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감독은 2시간이 넘는 시간 내내 비교적 차이콥스키의 ‘위대한’ 음악적 업적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시대의 희생에 의해 뒷받침되고 있음을, 민중의 삶, 구체적으로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과는 유리돼 있었음을, 비교적 비판적 시선으로 이어가고 있다.

 

인물 구도와 비중에 있어 차이콥스키 대 밀류코바를 거의 7대 3비율로 구성한 것, 차이콥스키의 음악을 한 번도 전면에 내세우지 않았다는 것 등은 감독의 그런 의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안토니나 밀류코바의 구애 공세를 보여주는 영화 초반부는 눈물겹다. 여인은 예수에게 자신의 남자를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하고 남자가 자기 것이 되게 해달라고 차가운 돌바닥 위에서 기도에 기도를 거듭한다. 남자에게 팬 레터를 보내고, 그에게 다가서기 위해 음악원에 들어가고, 결국 남자가 자기 집에 오게 하기 위해 편지에 편지를 쓰기를 반복한다.

 

남자가 방문하는 날 그녀는 온 집안을 깨끗이 치우고, 가장 순결해 보이는 옷을 입고, 가장 예쁘게 차려입은 채 그와 마주 앉아 이렇게 말한다. “처음 뵈었던 날부터 제가 바랐던 건 한 가지예요. 선생님을 안고 키스하는 거 그리고 평생 함께 하는 거요. 그럴 자격이 없겠지만요. 정신 나간 팬은 아니에요. 이제 어떤 다른 남자에게는 끌리지 않아요.”

 

이런 고백을 하는 여인을 남자는 어떻게 받아들일까. 사랑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다. 한 가지나 몇 가지 법칙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매우 복잡 미묘한 것이며 늘 추앙과 비난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고 한참이 있으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차이콥스키를 비난하지 않게 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둘의 만남은 애초부터 잘못됐던 것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이 안타깝고 불쌍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게 된다. 사랑은 어렵다. 어려운 사랑 때문에 많은 사람은 참담해진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잔혹한 러브 스토리가 사람들을 성장시킨다. 영화 ‘차이콥스키의 아내’가 던지는 궁극의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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