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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준석의 작가탐방<13>-이현의 예술세계

- 초록색 별 -

내가 떠나면 가야할 곳
그곳에서 나는 때로
세상의 풍경들을 그리워할 것이고
가끔 어떤 이를 그리워할 것이고
붉고 혹은 하얀 달을 그리워할 것이고
이현의 『지중해의 빛- 열정』 중에서…

 

동양의 정신… 순수의 色 유럽 현대미술의 구세주

 

이현의 그림에는 폐부 깊숙한 곳에서 흘러나오는 듯한 잔잔함과 떨림이 있다.

2년 전쯤에 필자는 국내의 어느 아트페어에서 여러 작가들의 그림을 감상한 적이 있었다. 좋은 그림도 많았지만 상업적인 냄새가 나는 그림도 적지 않았다. 개인 부스를 돌던 중에 이현이라는 작가의 작품들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대단한 감각과 함께 투박하면서도 대담함이 엿보이는 보기 드문 작품들이었다. 그 작가를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다른 부스의 그림들을 감상한 뒤에 다시 이현의 작품이 있는 곳으로 갔다.

터프함을 담고 있는 그 작품들은 예상과는 달리여성 예술가의 것이었다.

그 후로 필자는 수취인 주소의 동 이름이 조금 틀리게 적힌 우편물 하나를 받았다. 이현으로부터 온 개인전 팸플릿이었다. 반가운 마음과 함께 비록 바쁘기는 하지만 꼭 한번 가보리라 맘을 먹고 짬을 내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개인전은 이현이라는 작가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비교적 큰 규모의 작품들이 어림잡아 60여 점 정도 전시되어 있었다. 시원한 흐름으로 처리된

그림들이 편안함을 주었다. 그녀의 작품들은 마치 음악이 흐를 것 같은 시적인 그림이었다.

전시 공간에서 차 한 잔을 한 우리는 작업실에서 한 번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어느 날 불현듯 찾은 작업실은 아늑하고 편하게 느껴졌다. 필자는 평소 그림 그리는 도구 이외의 것으로 꾸며진 작업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도 은은한 작업실 분위기는 왠지 그녀의 작업과 동일함을 느끼게 하여 좋았다. 어려서부터 그림보다는 음악을 더 좋아했다는 이현은 편안함을 주는 음악을 틀어주었다. “그림은 음악과는 달리 혼자만의 세계를 지킬 수 있어 참 좋다고 생각 했어요.”

이렇게 이현과의 대화는 시작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작가의 타고난 끼와 기질을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당당했다. “유럽에서 공부하고 함께 생활하였지만 그들 것을 배우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들이 해낼 수 없는 것들을 염두에 두었어요. 나는 동양에서 왔고 내 것을 그들과 함께 나누자. 동양의 에너지를 그들에게 주려고 하였죠. 결국 하나가 아니겠어요? 본질은 같은데 아주 작은 것들이 다를 뿐이에요.”

음악적 감성이 뛰어나서 조화로움을 터득한 때문인지 작가의 생각은 열려있었다. 꽤 오래된 듯한 낡은 풍금이 초등학교 때의 추억을 되살려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당당함이 담겨있는 이현의 그림은 풍요로움과 강함 그리고 부드러움이 흐르면서 여유가 있다. 마치 그림의 정곡을 꿰뚫고 그려진 듯 한 그림인 것 같다. 현재 이태리 로마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현은 그곳에서도 단연 인기 작가이다.

이태리 유력 일간지인 CORRIERE DELLA SERA에서 그녀를 꽤 크게 기사화한 적이 있다. 이태리 출신의 지명도 있는 작가들도 쉽게 받을 수 없는 대접이었기에 이태리 대사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패거리 문화를 특히 싫어하는 이현은 개성이 남달리 강한 작가이다.

자신의 그림에 동양의 정신이 깃들어있다고 주장하는

그녀의 작품에는 인간적인 순수성이 존재한다고 생각된다.

이현은 얼마 전에 이태리에서 개인전을 했다. 프랑스 소르본대학의 교수이자 미술평론가인 피에르 프레노 드뤼엘은 “이현이 죽어가는 유럽의 현대 미술을 구했다”라고 극찬하였다.

그는 또한 “이 그림은 우리를 사로잡는다. 그것은 단순한 시각이 아니라, 화가가 비전을

 

그리고 사물을 파악했음을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라고도 하였다.

이현은 다른 작가들의 그림 경향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다만 순수성을 잃지 않으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업을 감성적이면서도 냉철한 이성으로 추구한다. 점점 딱딱해져 가는 현대 미술의

흐름에서 볼 때 이현의 작품은 삭막해져 가는 유럽 미술에 오아시스와도 같은 신선한 충격을 주었을 것이다. 그녀는 국내에서보다 국외에서 더 인정받는 작가인 것이다.

이현을 만나기로 한 날에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국내 최초로 코리아국제발레콩쿠르가

개막됐다. 이현과 필자는 그곳으로부터 각각 초청장을 받은 상태였다. 그곳에서는 이현을

포함한 몇몇 주요 작가들의 초대 기획전이 계획되어 있었다. 전시장을 둘러보고 발레도

감상할 수 있는 일석이조의 기회라고 생각되었다. 유니버설아트센터에 전시된 이현의 그림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밝은 색과 강하면서도 부드러운 리듬감 때문이라 여겨졌다. 역시 회화적인 맛이 있었다. 여러 번 손이 가지는 않았으면서도 힘이 있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다시 한 번 들었다.

그녀의 그림을 보며, 며칠 전 예술의 전당에서 개인전을 할 때 출간된 『지중해의 빛― 열정』이라는 그녀의 책자가 떠올랐다. 자신의 그림과 함께, 그에 적절한 마음이나 생각 등을 간단히 시구(詩句)나 메모로 남긴 내용이었다. 작가의 그림에는 책의 내용처럼 빛의 선율이 음악처럼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가히 지중해의 빛과 열정이라 할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지중해면 어떻고 동해의 떠오르는 빛이면 어떠한가! 이현이 말한 것 처럼 다 사람이 사는 동네이고 그게 그거인데….

작품에서 느껴지는 빛의 울림은 마치 힘 있는 음악과도 같았다.

마치 음악이 살갑게 흐르르는 어느 화가의 카페에서 마음에 맞는 반가운 사람과 포도주 한 잔을 마주하고 지친 심신을 위로 받는 듯 하였다.

빛의 선율로 이루어진 이현의 그림에는 폐부 깊숙한 곳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듯한 잔잔함과 떨림이 있다.

마치 밤을 지새운 젖은 새들이 영롱한 새벽이슬에 그 마음까지 젖어버린 듯한 가녀린 떨림이 소리 없이 흐른다.

이현의 작품에는 그런 맛이 있다. /글=장준석(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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