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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塊)’에 심취한 이서지 화백

풍속화가로 명성을 얻은 이서지 화백이 40년 넘게 손에 쥐고 있던 붓을 놓았다. 그에게 붓은 친구처럼 때론 연인처럼 다정한 존재였다. 또 온갖 시름과 고뇌를 잊게 해준 동시 고단한 삶을 지탱하게 했던 힘의 원천이기도 했다.

 

손때 묻은 붓은 시골 장터와 초가집, 풍물놀이 등 이미 사라진 옛날 옛적 우리네 풍경을 재현해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긴요한 도구이기도 했다. 잘 때에도 머리 겉에 둘 정도로 애지중지 여겼던 붓을 놓은 연유는 무얼까. 해답은 목수들이 쓰던 먹통에 있었다. 해서 그는 스스로 노목수라고 칭했다.

이서지 화백은 초등학교 때 담임선생님에게 제법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었으나 대학 전공을 경제학과로 택해 은행원을 꿈꾸었을 뿐 그림과는 거리가 멀었다.

취직준비를 하던 어느 날 어릴 적 하얀 도화지를 채워가던 그림이 문득 떠오른 것이 인생의 갈림길이 되었다.

그러나 산입에 거미줄은 칠 수 없어 1961년 6월 신문사에 취업, 삽화나 만평을 그리기 시작했다.

 

 

 

화가로의 첫발을 디딘 셈이다.

“사주에게 일이 끝나면 내 시간을 갖겠다는 조건으로 입사했어요. 조금 당돌했지만 그 후로 누구에게 배우지 않고 혼자 그림공부를 했습니다. 독학은 스승과 선후배가 없어 외로운 한편 화단에서 인정받는데 긴 세월이 필요했지요”

직장 생활 도중 주변 풍경을 틈틈이 스케치해 나간 작업은 자연스럽게 풍속화를 붙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

개인 작품이 세상에 처음 얼굴을 내민 것은 1972년 11월 신세계 화랑개인전으로 전혀 기대않았던 호평이 쏟아졌고 아름아름 이서지라는 이름 석 자가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다.

70년대에서 90년대 초반까지 작품이 없어 못 팔정도로 특수를 누렸던 그는 그 후 긴 세월 초가집, 제기하는 아이, 썰매지치는 아이, 횃대에 올라 새벽을 깨우는 닭, 소싸움, 장터, 꽹과리를 앞세우고 징, 북, 장구를 치며 동네 어귀를 신명나게 돌아치는 풍물패 등과 씨름했다.

“정다운 우리들의 자취가 불과 50년 세월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처음엔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출발한 것이 다른 분야를 돌볼 겨를을 없게 만들었지요. 나라고 다른 영역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이 간간이 들기도 했습니다만 최대한 변신을 억제한 나날인 셈이었죠”

IMF의 거센 파고로 인한 불황은 미술계에도 불어 닥쳤고 풍속화의 열기도 조금씩 식어갔지만 그토록 갈망하던 미술관을 2005년 과천에 지어 정착하는 기쁨을 누렸다.

한번 풀이 꺾이자 좀체 만회가 되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했으나 고집스럽게 풍속화에 매달려온 이 화백은 어느 시점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문득했다.

2~3년 전 수채화 안료대신 아크릴을 사용한 반추상화인 신민화(新民畵)와 단청이 그 작업의 일환이었으나 붓은 여전히 그의 손에 들려있었다.

허나 국내시장만으로 한계를 느낀 그는 글로벌시대에 세계를 노크하자면 풍물이나 풍경만으로 한계가 있다고 판단, 미답의 길을 가기로 결심한다.

고심 끝에 지난해 가을 붓을 온전히 놓아버리고 먹통을 손에 쥔 채 전통과는 거리가 먼 완전한 추상화 기법인 ‘괴’(塊)라는 새로운 영역도전에 나섰다.

우리말로 옮기면 덩어리인 ‘괴’는 붓이 아닌 먹줄로 그림을 완성하는 것으로 지금까지 그 누구도 시도하지 않았던 생소한 분야다.

암 투병 중인데다 일흔일곱인 희수(喜壽)의 나이가 아니더라도 평단(評壇)이 두려웠을 법하고 이제는 쉬어야 할 연령에 체력이 걱정되지 않았을까.

 

 


“지금까지는 실제 현상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일에 매달려왔습니다. 그간 독특한 영역을 개척하고 싶다는 의지가 생기지 않았으나 늦은 시기에 나만의 세계가 담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갈증이 노욕은 아닐 테죠. 그리고 지금도 하루 6~8시간 이상 작업에도 끄떡없습니다”

말하는 톤은 낮고 부드러웠으나 비장함이 서려있어 마지막 승부수를 던지는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인터뷰 도중 한옥을 지을 때 목수들이 정교한 건축을 위해 사용했던 먹통을 이서지 화백이 그림의 도구로 쓰겠다는 생각을 대체 어떻게 했을까는 궁금증이 슬며시 고개를 치켜든다.

“지난 해 여름 어느 날 번다한 마음을 달랠 겸 이곳저곳 바람을 쐬는데 전통가옥을 짓는 목수의 목줄 튕기는 장면을 목격했죠. 전혀 뜻하지 않는 곳에서 작품구상을 발견한 셈인데 이것도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라는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괴’는 캔버스 위에 아크릴 물감을 적신 먹줄을 튕겨 수많은 직선들이 행진하며 하나의 덩어리를 이룬다.

어찌 보면 그림의 검은 부분은 물감을 진하게 바른 듯하고 옅은 부분은 덜 칠한 듯하다.

그러나 그 어둠은 쉼 없는 목줄의 튕김 끝에 완성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노구(老軀)의 노력이 숙연해진다.

모인 곡선은 만났다 헤어짐을 반복하며 형태를 갖춰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꿈틀대는 생동감을 안겨준다.

불규칙 속에 질서정연한 규칙이 숨어있는 작품을 유심히 살피다보면 오묘하고 기이한 세계와 맞닥뜨리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구상에서 비구상으로 건너뛰고 현대화의 길목에 섰지만 전통 수묵화 향기가 짙게 배어나고 여백의 멋을 느끼는 점도 참 묘한 일로 다가선다.

“돌, 달, 지구 등 모든 자연의 덩어리는 곡선입니다. 직선이 포개져 있지만 관람객들은 곡선을 통해 이런 것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모인 선들은 꽃일 수도 있고 강과 산 그리고 자신을 스쳐간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또 희망과 슬픔, 애환과 환희, 분노 등 인간의 감정이 모두 담겨있지요.”

작품 설명이 알듯 모를 듯 선뜩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피니 그런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탄생한 40여점의 작품들은 서울 경운동 다보성캘러리에서 첫 선을 보였다.

생소한 것은 쉽게 다가서지 않아 처음 반응은 시큰둥했으나 곧 미술평론가들의 찬사가 쏟아졌다.

이어 뉴욕 맨해튼 텐디캘러리와 서울 코엑스 컨벤션센터 전시장에도 ‘괴’는 그 모습을 보였다.

세계적인 미술월간지 아트 인 아메리카 등의 호평은 그 뒤를 따랐다.

“심오하고 감명 주는 작품이 되기 위해 원점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자세로 임하고 있습니다. 후세에 길이 남을 명작을 위해 괴에 여생을 바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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