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수원사람들] 8. 故 홍난파
[수원수원사람들] 8. 故 홍난파
  • 최영재 기자
  • 승인 2012.03.25 18:57
  • 댓글 0
  • 전자신문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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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울분 달래주던‘한국의 슈베르트’불멸의 노래로 영원하다

▲ 故 홍난파
‘울밑에 선 봉숭아야 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속에서 살던 때가 그립습니다.’

한국인이면 누구나 배우고 불렀던 노래

‘봉숭아’와 ‘고향의 봄’.

전주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는 어르신들의 말처럼

가슴에서 가슴으로 흐르는 민족의 정한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불멸의 노래들.

세계대회에 공동으로 선수단을 출전시키는

남북이 입을 모아 합창하는 노래의 작곡가는

바로 수원사람 홍난파다.

‘한국의 슈베르트’라 불리며

‘봉숭아’, ‘고향의 봄’, ‘성불사의 밤’ 등 십 여곡의 가곡과

‘오빠생각’, ‘나뭇잎’, ‘개구리’ 등 111개의 동요를

작곡한 천재 작곡가.

일제 식민 치하에서 민족의 울분을 달래고 희망을 일깨워줬던,

그러나 아직도 친일논란을 받고 있는

홍난파, 그를 만난다.
 

▲ 수원시청 맞은편 올림픽공원에 자리한 故 홍난파 시비. /노경신기자 mono316@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강탈한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으로 우리 민족을 탄압하며, 수탈과 민족문화 말살에 발광하던 그 아픔의 시절. 나라잃은 민족의 쓰라린 굴욕과 한을 달래며 저항에 나서던 때 탄생한 최초의 예술가곡 ‘봉숭아’.

삼천리 한반도는 물론 만주에서까지 휘몰아친 3·1운동으로 일어선 이후 일제의 폭압에 고통받던 1920년 작곡한 서양음악의 선구자이자 우리나라 최초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바로 홍난파다.

본명은 영후(永厚). 1898년 수원에서 태어난 홍난파는 마을 글방에서 한학을 배웠고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 중학부에 입학, 바이올린을 구입해 음악수업을 했다.

15세 되던 해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전문교육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해 성악을 전공했고 졸업 후에는 보조교사로 있었다. 1918년 일본에 유학했다가 1919년 3·1운동 참여를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했다. 3·1운동 후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다시 귀국했다.

그는 유학시절 비록 일본에서 발간한 것이지만 ‘삼광’이라는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를 발간했고, 귀국 후 기자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5년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가졌으며 국내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했던 홍난파는 1929년 창작동요 100곡을 수록한 ‘조선동요 100곡집’ 상권을 연악회를 통해 간행하기도 했다. 이후 미국 유학에 올랐던 홍난파는 귀국후 이화여전 강사로 있으면서 ‘조선동요 100곡집’ 하권을 펴냈다.

한국 최초로 교향곡 연주를 지휘하는 등 대한민국 음악사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한 홍난파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검거된 후 고문을 당해 늑막염을 앓았고, 결국 1941년 44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후 해방된 조국에서 지난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돼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했고,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했다.

1968년 그의 고향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

또 1992년 8월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홍난파가 살던 집은 지난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됐다.
 

 

▲ <자료제공=단국대학교>


홍난파가 뛰어난 예술가란 사실을 음악뿐만 아니라 문화예술 전반에 걸친 주옥같은 작품들에서 확인된다. 바이올린 곡 ‘애수의 조선’, ‘로만스’, ‘여름밤의 별들’에서부터 가곡 ‘성불사의 밤’, ‘사랑’, ‘금강에 살으리랐다’ 등에 수많은 동요는 여전히 우리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들이다.

또 ‘음악일화’, ‘동서음악의 비교’, ‘조선문화 20년’ 등의 평론과 함께 ‘서울 계신 K형께’, ‘첫 무대의 기억’, ‘악단의 뒤에서’ 등의 수필, ‘최후의 악수’, ‘처녀혼’ 등의 소설도 썼다.

그러나 우리나라 대표 동요로 전국민이 즐겨 불렀던 ‘고향의 봄’을 지난 2000년 이후 더 이상 교과서에서 찾아 볼 수 없게 됐다. 아직까지도 평가가 엇갈리는 홍난파를 둘러싼 친일 논란이 불후의 명곡 ‘고향의 봄’을 교과서에서 사라지게 만든 이유다.

홍난파의 유족들은 생전에 연주하던 바이올린과 대표작들의 악보 등 총 116종 900여점의 유품을 단국대학교에 기증했고, 단국대는 1984년 홍난파의 유족이 참석한 가운데 ‘난파 기념 음악관’을 개관했다.

현재 단국대는 죽전캠퍼스 내에 ‘난파 기념 음악관’의 새로운 조성을 준비중으로 홍난파의 조국사랑과 예술혼이 담긴 그의 흔적들은 비록 교과서에서 ‘고향의 봄’이 사라지는 아픔을 겪기도 했지만 이후에도 꾸준히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홍난파에 대한 평가는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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