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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한의 세상만사]기록은 장난이 아닙니다

 

‘기억력보다 무딘 연필이 낫다’는 독일 격언처럼 기록습관 들이면 사회학적 연구에 보탬

우리네가 일본사람들에게 배울 점을 들라 하면 자질구레한 일도 꼼꼼하게 기록(記錄)하는 습관을 으뜸으로 친다.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일본은 없다’, 그 책에 ‘결혼 삼십년의 청구서’란 글이 있는데…. 어느 호기당당(豪氣堂堂)한 일본 사내는 술을 마시면 같이 마신 꾼들을 새벽 한 시건, 두 시건 꼭 자기 집에 데리고 간다.

‘술상 올려라!’ ‘이것도 안주라고 내놓느냐!’ 트집을 잡지만 놀라운 것은 부인이 기모노를 단정히 입고 생글생글 웃는 얼굴로 공손히 ‘하이, 하이’ 하면서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을 하더란다.

그런데 그 친구 직장에서 정년퇴직과 동시에 이혼 당했다는데…. 결혼 사십년 악행(惡行)을 조목조목 기록해서 법원에 제출했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외박은 몇 년 몇 월 며칠, 손찌검한 횟수, 그리고 자신이 당한 정신적 쇼크, 한밤중에 손님을 데리고 온 날짜와 시간, 그리고 동반자 이름까지. 한때, 남자들의 로망이 양옥집에서 살고, 중국음식 먹고, 일본여자와 결혼하는 것이라 했는데….

하기야 부부 싸움할 때마다 전쟁(戰爭) 벌인 날짜와 그 이유, 과정, 결과, 이런 것 또박 또박 적어놓고 세월이 흐른 후 펼쳐보면 이가 안 갈릴 사람 어디 있겠는가? 모든 습관에 긍정과 부정이 혼재(混在)하지만… 어째 씁쓸하다. 기록도 기록 나름이지 권장하고 싶진 않다.

얼마 전 김안제(金安濟) 교수란 분이 ‘인생 팔십년’이란 책을 냈다. 서울대 환경대학원장을 지낸 분인데, 여러 신문에서 인터뷰 기사가 나와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벌써 20년 전 환갑 때 ‘한 한국인의 삶과 발자취’란 836쪽의 두꺼운 책을 세상에 내놓았다.

이번 발간한 책은 증보판(增補版)인 셈이다.

‘취미 생활 총괄란’에 보면 16세에 트럼프를 배웠고, 흡연은 1966년 3월 25일 시작하여 2만1천98갑, 술은 1962년 4월 7일부터 마시기 시작하여 소주 2홉들이 기준으로 2만1천194병…. 숨 막힌다.

중학교 때 배운 대중가요는 ‘군사우편’, ‘굳세어라 금순아’, ‘홍도야 울지 마라’ 등 37곡(제목이 전부 기록되어 있음). 60∼61년 교수시절에는 ‘낭만에 대하여’, ‘벽오동 심은 뜻은’, ‘사랑은 장난이 아니랍니다’, ‘잊혀진 계절’ 등 그때까지 배운 노래만 643곡…. 연도별로 읽은 책 제목, 관람한 영화제목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뿐 아니다. 몇 년 몇 월 누구와 어느 골프장에서 몇 타를 쳤고 비용은 얼마 들었고…. 연도별 수입 지출항목은 세분화 했다.

우선 수입항엔 보조금, 보수금, 수고비, 발표비 그리고 지출항목엔 생활비, 수학비, 양육비, 공과금.

혹시 무슨 대학교수가 골초에 잦은 술자리 그리고 골프. ‘그러면 소는 누가 키우노’ 하고 개탄(慨歎)하는 사람 있을지 모르지만 그건 기우(杞憂)! 도시 계획분야에서는 아직도 이 분을 뛰어넘을 사람이 없다고 한다. 아직도 고향에서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김안제 반의반만큼이나!’ 이런 말이 있다.

20년 전 그 귀한 책을 선물 받고 박주(薄酒)를 대접했다. “죄송하지만 좀, 아쉽습니다. 사모님에게는 치명적이겠지만 혹시 평생 알고 지낸 이성(異性) 친구들과 모년 모일 어느 곳에서 누구랑 어디까지 갔고, 세월이 흐르면 이런 것도 사회학적 연구에 보탬이 될 턴데.” 이런 말로 떠 걸자, “솔직히 아쉬운 면도 있는데 마누라가 아직 호랑이입니다. 고양이가 됐을 때쯤, 증보판(增補版)을 발간할 때 반드시 이 한 몸 희생하겠소!”

그러나 이번에도 지뢰(地雷)는 피했나 보다. 아니면 벌써 ‘후학들을 위해 용감하게 김 박사 자폭(自爆)하다’ 떠들썩했을 턴데. 김 박사님이 갑자기 보고 싶다. 독일 격언에 ‘기억력이 좋은 머리보다, 무딘 연필이 낫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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