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1 (토)

  • 흐림동두천 19.2℃
  • 맑음강릉 24.5℃
  • 구름많음서울 19.8℃
  • 구름많음대전 21.3℃
  • 구름많음대구 23.2℃
  • 구름많음울산 21.2℃
  • 구름많음광주 22.3℃
  • 흐림부산 19.1℃
  • 흐림고창 21.3℃
  • 흐림제주 22.7℃
  • 구름많음강화 18.7℃
  • 구름많음보은 20.8℃
  • 흐림금산 20.8℃
  • 흐림강진군 22.2℃
  • 구름많음경주시 23.9℃
  • 흐림거제 19.5℃
기상청 제공

[숨n쉼]수원 화성행궁에서 만난 ‘기생’

 

지난해 여름에 “조선의 기생과 수원 화성권번”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한 적이 있다. 수원예기보존회에서 주최한 공연이었다. ‘기생-화젯거리’라는 화두를 앞에 두고, 수원화성의 전통문화예술에 대한 역사기록 중에 여성과 기생을 중심으로 삼았다. 공연 무대는 한여름 밤에 유난히 별이 총총히 빛나던 화성행궁의 낙남헌이었다. 그때 자리했던 많은 사람들이 전통 공연과 주제발표를 숨죽여 공감하던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 필자는 기생 연구를 시작한 지 10여 년이 되었다. 그 세월만큼 저작물도 쌓이게 되자, 이곳저곳에서 특강 의뢰가 많이 오는 편이다.

수원은 기미년에 독립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기생 김향화, 즉 의기의 고장이다. 의기 김향화의 만세운동은 비교적 일찍부터 알려졌는데, 최근에 와서야 뒤늦게 각광받은 경우다. 일제 강점기의 기생조합인 권번에 소속된 기생들은 전통춤의 계승자로 각종 공연을 통하여 전통예능 교육의 기능을 담당했다. 그 공연은 ‘음악무도대회’, ‘기생조합연주회’, ‘고아원 및 학원 후원연주회’, ‘이재민구조연주회’ 등 다양한 주제로 공연되었다. 기생들의 자선 공연은 지역 사회에 순기능의 역할로 참여한 좋은 예였다. 이러한 자선 연주회는 기생 권번의 사회적 기능으로 지방에서도 어김없이 공연이 많았다.

수원의 화성권번에서 1922년 5월에 수원 상업강습소를 위하여 수원극장에서 자선극을 개최한 기록이 있다. 수원상업강습소는 지금의 수원고등학교와 수원중학교이다. 강습소가 1909년 창립된 후, 원래 기본 자본이 없어서 근근이 유지되었는데 그 후 강습소 입학지원자가 급증함에 따라 학교 건물이 협소해졌다. 이에 건물을 신축하기 위한 모금활동이 일어났다. 수원 기생들은 자선극의 수익금으로 이를 기부한 것이다. 1920년대 수원에 있는 요릿집은 성황을 이루었다. 이러한 소문을 듣고 기생들이 각처로부터 몰려들기 시작하였다. 각처로부터 기생이 모여 드물게 다른 곳에 비해 이채로움으로 활기가 넘쳤다.

더구나 사랑을 위하여 단발을 결심한 수원 화성권번의 기생들 이야기는 절절하기까지 하다. 당시 여성들의 긴 머리는 생명과도 같았다. 하지만 수원 기생들 사이에서 단발사건은 일곱 번이나 되었다. 언론에서 수원기생에게 ‘단발병’이 들었다는 소문이 퍼진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1930년대에 들어서자, ‘단발미인’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질 만큼 이전 시대부터 실행해온 단발이 신여성들 사이에 크게 유행했다. 처음에는 화력을 이용한 ‘고데’를 하는 바람에 모발이 많이 손상되었지만 서구에서 파마 기구가 수입되면서부터는 한층 안전하고 편리해졌다. 웨이브를 주는 파마까지 등장해 퍼져나갔다. 파마의 가격은 쌀 두 섬에 해당할 정도로 엄청났지만, 주로 기생을 선두로 해서 차츰 확산되었다.

조선사회에서 유일하게 여성 문학과 전통 예술을 계승하였던 ‘기생’은 매력적인 문화콘텐츠의 대상이다. 문화콘텐츠의 스토리텔링 분야에서 탁월한 제재와 소재가 될 뿐더러 대외 경쟁력도 뛰어나다. 머지않아 우리나라 문화의 콘텐츠에서 비교우위로 내세울 수 있는 ‘국가대표’ 브랜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기생제도는 조선시대에 발전하여 자리를 굳히게 되어, 기생이라 하면 일반적으로는 조선의 기생을 지칭하였다. 사회계급으로는 천민에 속하지만 시와 서, 음률에 능해 교양인으로 대접받는 등 특이한 존재였다. 권번은 정식 국악교육기관은 아니었으나 민속음악의 교육에 적지 않은 공헌을 한 셈이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기생의 이미지를 ‘창기’, ‘작부’와 동일시하게 된 계기는 일본의 성풍속이다.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는 인식 없이 일본의 성문화 관점에서 우리 전통 예악문화의 계승자였던 권번 기생을 대하면서 우리 기생이 갖고 있던 아우라(aura)를 부정하였다. 게다가 타락한 소수의 사이비 기생과 유녀들이 ‘기생’으로 참칭하면서 기생 이미지는 왜곡되었다. 이 때문에 뭇사람들이 ‘기생 파티’란 말을 거부감이 없이 사용하였다. 그러나 본질 면에서나 역사적 시각에서나 기생의 이미지는 보존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지켜낼 의무는 기생 연구자의 몫으로도 남겨진 셈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