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교민들 “왜 옮기는지 이해 안돼”민간단체 “쇼겐 씨 뜻 따라야”

일본 오키나와 한국인 위령탑 갈등
2006년 공개된 외교통상부 문서에 건립 내용 담겨
조총련 추진에 한국 정부 발빠른 대응…1975년 건립

 

 

일본의 최남단 현으로 ‘아시아의 하와이’로 불리는 오키나와.

450년 간 류큐왕국의 영토였던 이 섬은 1945년 3월, 태평양 전쟁에서 최대 규모의 전투로 알려진 오키나와 전으로 당시 일반주민과 군인 50만명 가운데 23만명이 희생된 최대 격전지이기도 하다.

전쟁에서 밀린 일본군의 집단자살 현장인 나하 외곽의 마부니(摩文仁) 언덕에 조성된 평화기념공원에는 이 전투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 이름이 빼곡히 새겨져 있는 비석이 있다.

그 중에는 오키나와 전에서 희생된 1만여명의 조선학도병 중 신원이 확인된 447명(남한 365명, 북한 82명)의 이름도 있으며, 특히 1975년 광복 30주년을 기념해 세운 2천115.7㎡(640평) 규모의 한국인 위령탑 공원 내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친필로 쓴 비문과 이은상 시인의 ‘영령들께 바치는 노래’가 새겨진 비문도 있다.

이처럼 전쟁의 아픔이 아직 생채기로 남아 있는 오키나와 내 한국인 위령탑이 국내 한 민간단체에 의해 제주도로 옮겨진다는 이야기는 위령탑을 관리하던 민단과 주민들에게 있어 더 큰 상처로 다가오고 있다.

■ 위령탑의 건립 목적과 배경

오키나와 내 한국인 위령탑이 세워진 배경을 알 수 있는 공신력 있는 자료는 지난 2006년 3월 말 외교통상부가 일반에 공개한 ‘오키나와 한국인 위령탑’ 관련 외교문서가 유일하다.

이 외교문서에 따르면 당시 정부가 1970년대 중반 오키나와에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보다 먼저 2차대전 당시 현지에서 희생된 한국인을 위해 위령탑을 건설하려는 일련의 모습들이 기록돼 있다.

1974년 초 당시 김동조 외무장관은 주일 대사관에 “북괴가 오키나와에 2차대전 당시 징용·징병으로 희생된 한국인에 대한 위령탑 건설을 기도하고 있다. 희생된 망령들을 위로하고 북괴에 기선을 제해 북괴의 오키나와 침투여지와 구실을 없애고자 한다”며 위령탑 건립 목적과 이에 대한 대책을 긴급 지시했다.

조총련은 이보다 훨씬 앞서 1972년 8월 ‘오키나와 조선인 강제연행 학살진상 조사단’을 현지에 파견하고, 위령탑 건립을 위해 모금을 추진중이라는 얘기가 나돌던 상황이다.

이에 주일대사관은 양구섭 참사관을 오키나와 현지에 급파, 그가 올린 현장실사 보고서를 토대로 토지매입, 건축허가 등 조총련보다 발 빠른 대처를 위한 행보를 이어갔다.

외무부는 1974년 6월 13일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위령탑 건립 계획’을 보고하고 일본 도쿄에 ‘위령탑 건립위원회’ 설치를 위한 재가를 요청했다. 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결재란에 “즉각 지원 조치할 것”이라는 ‘특별지시’까지 내린다.

이 후 관계부처 실무자회의가 열리고 비문작성위원회가 구성되는 등 위령탑 조기건립을 위한 범 정부차원의 총력전이 전개됐다.

또 위령탑 건립 추진위원회가 구성됐고, 재일 민단이 자율적으로 위령탑 건립을 추진하도록 하기 위해 추진위 위원장에 당시 윤달용 민단 중앙본부 단장을 임명했다.

이와 함께 신문광고를 통해 전국 각 도(道)에서 화강암과 옥석 수집 캠페인을 전개, 이를 통해 모은 돌을 배편으로 오키나와로 직접 수송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75년 4월 9일 오키나와 남단 마부니에 위령탑 건립을 위한 기공식이 개최됐고, 같은 해 8월 14일 준공을 마쳤다. 이어 9월 3일에는 정부대표로 당시 고재필 보건사회부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위령탑 제막식이 불교식으로 거행됐다.

이러한 움직임에 조총련 측은 위령탑 기공식 후 ‘일조 국교정상화 오키나와 현민회의’의 이름으로 한국인 위령탑 건립을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 불만을 표시했다.

주일대사관 측은 조총련의 위령탑 파손행위를 우려, 일본 경찰당국에 특별 경비를 요청하는 등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재일민단, 박정희 대통령 친필 새긴 돌만 이전 배경에 의구심

렛츠피스, 일본인·역도산 등이 먼저 모금… 역사 바로 잡아야

재일 민단과 렛츠 피스의 충돌


민단과 재일교포 등의 성금으로 매입된 2천115.7㎡(640평) 규모의 한국인 위령탑 공원 부지는 1978년 대한민국으로 기부돼 등기부등본상 한국 토지로 되어 있다.

또 1975년 위령탑 준공 이후 재일 민단과 오키나와에 거주하고 있는 일본인들과 재일교포들로 구성된 일한친선협회가 함께 매년 10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위령제를 열고 있다.

이러한 위령탑을 한일 양국의 정치·경제·문화예술인 등 각 50명으로 구성된 ‘렛츠피스’라는 민간단체가 한국으로 이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 두 단체간 마찰이 시작됐다.

렛츠피스와 민단과의 첫 만남은 지난 7월 하순쯤 이뤄졌다. 당시 민단 측은 위령탑 이전 얘기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정부에서 관리하는 위령탑을 민간단체나 개인이 마음대로 옮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단 주도로 지난 10월 26일 한국인 위령탑 공원에서 열린 위령제에서 렛츠피스 관계자가 재방문하면서 문제가 커졌다.

특히 오키나와의 류큐 신보가 렛츠피스와 접촉해 다음날인 27일 ‘한국인 위령 석비, 제주도 이전 계획’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리고, 렛츠피스가 지난 달 3일 제주도에서 ‘한일공동기구’ 출범식을 통해 밝힌 자료를 한국의 일부 언론사에서 게재하면서 교민들과 오키나와 현 주민들까지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본 정부기관에서도 민단 측에 한국인 위령탑 이전 사실여부를 확인하는 등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재일 민단 측 주장

재일 민단 오키나와현 지방본부 측은 즉시 진화에 나섰다.

류큐 신보를 상대로 항의 공문을 보내 반박기사를 내보도록 하는 한편, 한국 언론사에서도 위령탑을 관리하는 민단의 입장도 확인하지 않은 기사 게재를 공식 항의했다.

민단 측은 렛츠피스에서 주장하는 ‘오키나와 한국인 위령탑’ 건립 내용은 사실 무근이며, 한 개인이나 단체가 국가 소유의 재산을 함부로 옮긴다는 것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김미경 민단 오키나와현 지방본부 사무국장은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위해 만든 한국인 위령탑을 왜 가져가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다. 특히 박정희 전 대통령의 친필이 새겨진 돌만 옮겨가겠다는 것은 어떠한 의도가 숨어 있는 것 아닌가”라며 의혹을 제기했다.

이어 “한국인 위령탑에는 당시 대한민국 정부와 민단, 오키나와현 정부와 주민들의 노력이 녹아 있다. 이 위령탑을 제주도로 옮겨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민간차원에서 한일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라고 분노했다.

김 국장은 또 “10월 열린 위령제 때 박진웅 총 영사는 렛츠피스 관계자에게 ‘이 문제는 개인이 얘기할 문제가 아닌 국가적인 사안이다. 이러한 문제를 논의하려면 영사관으로 찾아오라’고 까지 말했다”고 덧붙였다.



▲렛츠피스 측 주장

렛츠피스는 1974년 당시 정부가 움직이기 전에 오키나와 전투에서 일본학도병 지휘관으로 참전했던 일본인 생존자 후지키 쇼겐 씨(90)가 조선학도병 유골을 수습하고, 일본 프로레슬러로 활동한 역도산과 함께 12년간 모금활동을 전개해 한국인 위령탑을 주도해 세웠다는 자료를 제시하며 그의 뜻에 따라 위령탑을 제주도로 이전할 방침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영선 렛츠 피스 사무총장은 “외교문서라는 것이 당시 상황에 맞게 정리가 됐을 뿐, 구체적인 내용까지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 1965년부터 1974년 사이에는 조총련이 민단 측보다 더 영향력이 있었던 때라, 이 두 사람이 적극 나서지 않았다면 과연 정부와 민단에서 이곳에 한국인 위령탑을 세울 수 있었을 지 의문이 간다”고 말했다.

그는 “이러한 내용은 후지키 씨가 10여년 기록한 자료에 나와 있다. 당시 조선학도병과 생사고락을 함께 한 일본인의 의식 있는 역사증언이 어떤 다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겠냐”며 “민단 측은 후지키 씨의 말을 과대망상으로 치부하고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역사왜곡이라고 할 수 있다. 위령탑 이전 방법은 서로 합의해 진행하면 되지만, 일본인의 증언을 과대망상으로 치부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렛츠피스는 앞으로 후지키 씨의 증언을 토대로 국내에 이 같은 사실을 알리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