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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건축기술로 쌓은 벽돌마다 정조대왕 정성 고스란히

경기도가 품은 평범한 진리, 세계문화유산
1-1. 동양 성곽의 백미, 수원 화성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지난 1997년,
당시 등재를 주도한 고 심재덕 수원시장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되새겨야 한다’며
세계가 인정하고도 도민들에게 저평가되고 있는 우리 유산에 대한
아쉬움을 에둘러 표현했다.

십여 년이 훌쩍 흘렀다.
정조가 세운 화성은 이제 도민이 사랑하는 역사문화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등재 이후 추진된 본격적인 화성 복원 사업 덕분에
성곽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하나하나 채워지고 있다.

일제 침략, 6·25 전쟁 등으로 뼈가 깎이고 살이 베인
장안문과 팔달문이 옛 위용을 되찾았고
화성행궁, 화홍문, 방화수류정, 서·동장대 등이 잇따라 복원 정비되면서
수원 화성은 이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드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오는 6월 경기도에 또 하나의 옛 건축물이 다시 태어난다.
수원화성, 조선왕릉(융건릉)에 이어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있다. 경기도가 품은 세 번째 인류 공동의 문화적 자산이 된다.

‘수원 화성과 남한산성을 동시에 돌아보아야 비로소 한국과 한국인의 지혜를 알 수 있다’는 한 역사학자의 말처럼 수원화성과 남한산성이 품은
역사·문화적 가치를 총 4회에 걸쳐 되돌아본다. <편집자 주>



팔달문·장안문의 ‘옹성’ 출입문은 다른 성과 달리 중앙에 위치
군사적 목적 외에 사람·물자의 원활한 유통기능 함께 설계한 것
정약용이 중국의 병서를 참고해 고안한 ‘오성지’ 화성에만 설치


벽돌과 목재 혼합 기술 도입한 방화수류정은 뛰어난 건축미 자랑
네모난 틀을 짜고 그 안에 벽돌로 벽면을 채우는 방식 최초로 시도



군사 훈련 지휘하던 동장대 주변 공터에서 ‘호퀘’ 등 큰 행사 열려
공심돈은 화성에만 있는 건축물로 독특한 성곽 이미지 상징물




“화성 성곽의 건축물들은 동일한 것이 없이 제각기 다른 예술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1997년 4월 수원 화성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파견된 스리랑카의 ‘실바’(Nimal De, Silva) 교수가 3일간의 국내 방문조사에서 경탄을 금치 못하며 내뱉은 말이다.

수원 화성은 18세기 최첨단 건축 기술이 만들어낸 건축 박물관이다. 수원 화성의 둘레는 약 5천520m로 1794년 2월부터 축조가 시작돼 1797년 9월 완공했다.

단 2년 7개월 만에 일궈낸 걸작이다. 여기에는 전국 22직종, 1천840여명의 유능한 장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모이고 약 24㎏의 힘으로 625배나 되는 1만5천㎏의 돌을 들어 올릴 수 있는 거중기와 같은 새로운 기구가 고안돼 가능했다.

또 돌과 목재와 더불어 벽돌이 건축 재료로 본격 활용되면서 이전의 재료에서 만들 수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조형물이 탄생하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사통팔달, 팔달문과 장안문

팔달문과 장안문은 수원 화성의 4개 성문 중 얼굴에 해당하며 1796년 세워졌다. 팔달문의 이름은 팔달산에서 유래됐고 사방팔방에서 물자가 모이는 지리적 특성을 반영한 ‘사통팔달’의 의미를 갖고 있다.

장안문의 이름은 중국 당나라 때의 장안성 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팔달문과 장안문은 규모와 건축방법 등이 서울의 숭례문과 유사하다. 그러나 화성의 성문은 당시 다른 성문의 장점만을 취해 조선시대 성문 가운데 가장 발달된 것이었다.

두 개의 성문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은 옹성이다. 보통 옹성은 성문을 엄호하기 위해 성문 바깥쪽에 반원형으로 쌓은 성으로 출입구가 적이 쉽게 출입하지 못하도록 한쪽 구석에 설치된다.

그러나 팔달문과 장안문의 옹성은 출입문이 중앙에 위치한다. 여기에는 ‘사통팔달’의 정신이 녹아있다. 두 개의 성문은 방어라는 기본적인 목적 이외에 사람이나 물자의 원활한 유통 기능이 함께 설계에 반영된 것이다.
 

 

 


화성 장안문과 팔달문에는 ‘오성지’라는 방어장치가 있다. 이 시설은 정약용이 중국의 병서를 참고해 고안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오직 화성에서만 볼 수 있다.

‘오성지’는 옹성 출입문 위에 큰 물통을 만들고 여기에 물을 흘려 내보낼 수 있는 구멍 다섯 개를 내 성문을 보호하는 장치다. 이외에 두 성문에는 경복궁, 창덕궁 정문 등 일부 특별한 곳에서만 한정적으로 사용된 ‘우진각지붕’이 얹어졌다.

지붕 사면이 모두 경사진 ‘우진각지붕’은 전주, 평양 등에는 사용된 바가 없어 당시 정조가 화성 성곽에 쏟은 정성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다.

 



화성 제일의 경승지, 화홍문과 방화수류정

화홍문은 북수문 다리 위에 세워진 누각이다. 광교산에서 내려온 냇물이 모이는 작은 못에 7개의 수문을 내고 그 위에 다리를 놓아 누각을 세운 화성 제일의 경승지로 꼽힌다.

한양에도 다섯 개 물줄기를 튼 오간수문이 있었지만 그 위에 누각을 세우지는 않았다.

누각 아래에는 사람이 출입할 수 없도록 철제 살문이 달렸고 주변 벽돌담 곳곳에는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총구도 일정한 간격을 두고 흩어져 있다. 화성 제일의 경승지에도 유사시 방어 기능이 설계에서 배제되지 않은 셈이다.

화홍문 바로 위, 성의 동복쪽 바위 위에 설치된 방화수류정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한다.

방화수류정은 주변을 감시하고 그 아래 용연 연못의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각루다. 불규칙한 지형과 바위와의 조화를 고려해 평면을 ‘ㄱ’자로 만들었고 북쪽으로 돌출한 퇴칸을 마련해 위치에 따라 집 모양이 달리 보이는 건축물이다.

또 벽돌과 목재를 혼합한 건축 기술이 도입됐고 실내 한 가운데는 추위를 피할 수 있는 온돌방을 두어 색다른 내·외관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정조의 군사 훈련 지휘소, 서장대·동장대

장대는 장수가 장졸들을 모아 훈련을 하거나 지휘하는 건물이다. 서장대는 2층 누각으로 아래층은 사방이 개방되고 윗층은 군사가 올라가 주변을 살펴볼 수 있는 구조다.

이곳에서는 정조가 직접 군사 훈련을 지휘했고 장대한 군사 서열식인 성조식이 치러졌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당시 ‘화성장대’(‘華城將臺)라는 현판을 정조가 친필로 작성하기도 했다.

서장대는 주변 감시라는 특수한 기능 때문에 위로 올라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데 남한산성의 수어장대 역시 동일한 형태를 가진다.

화성 동편에 자리한 동장대(연무대)는 성 밖 감시보다 군사 훈련과 지휘의 역할이 컸다. 동장대 주변에는 탁 트인 공터가 있어 성안에서 벌어지는 ‘호퀘’ 등 큰 행사가 빈번하게 열렸다.

‘호퀘’는 군인들을 대상으로 음식을 베푸는 행사로 화성 축성 공사 기간 총 11번의 호퀘 중 6번이 이곳 동장대에서 열렸다고 한다.

건축 양식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동장대 뒤편이다. 건물 뒤에는 둥글게 휘어진 낮은 담을 쌓았는데 아래는 큰 돌을 모자이크식으로 올리고 그 위에는 둥글게 구운 기와를 가지고 연속으로 이어진 고리 무늬를 꾸몄다.

특히 반원형 벽돌을 고리모양으로 연결한 영롱장은 동장대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영롱장은 벽돌이나 기와 따위로 여러 가지 무늬로 구멍이 나게 쌓아 만든 담을 말한다. 동장대 역시 다른 화성 건축물과 동일하게 군사적 요소와 아름다운 예술성을 동시에 가졌다.



속이 빈 군사방어시설, 공심돈

공심돈은 조선시대 성곽에서 유일하게 화성에만 있는 건축물이다. 말 그대로 ‘속이 텅 비어 있는 돈대’라는 뜻인데 성벽을 돌출시키고 그 위에 돈대를 쌓고 꼭대기에 군사들이 머물 건물을 올렸다. 돈대에는 층마다 총과 포 구멍을 뚫었다.

돈대는 평지보다 조금 높직하면서 두드러진 평평한 땅을 말한다.

화성에 총 3개의 공심돈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세워졌는데 현재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 두 곳만 남았다. 남공심돈은 시가지 정리로 사라졌다.

서북공심돈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는데 동북공심돈은 소라처럼 돈대 안을 빙글빙글 올라가도록 설계됐다.

화서문 앞에 자리한 서북공심돈은 높이 13m로 벽돌로 안이 네모난 통 모양의 구조물을 만들어 내부에 3개 층이 있다. 각 층마다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구멍이 특정인데, 이는 화성이 가진 독특한 성곽 이미지를 만들어 낸 상징물로 표현된다.

창룡문 인근에 위치한 동북공심돈은 독특함에 있어서는 화성 건축물 중 제일이다.

바닥에서부터 원통형으로 생근 둥근 구조물이 우뚝 서 있고 건물 꼭대기에 건물이 올라가 있다. 이는 중국 건축물을 인용한 형태로 알려져 있다. 내부에는 층마다 계단이 둥근 성벽을 따라 둥글게 이어지는데 이런 특수한 구조로 ‘소라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조선 최초의 건축 혁명 이끈, 벽돌

수원 화성에서 벽돌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축성에는 크기와 모양에 따라 총 7가지 벽돌이 제작됐는데 현대의 벽돌 모양 이외에 삼각형과 반원형 등으로 구성됐다. 구조적인 측면에서 벽돌로 벽체를 쌓는 과정은 종전에 보기 어려웠다.

조선 건물 축조에는 돌과 목재가 주류를 이뤘다. 중국과 달리 조선에는 고운 흙이 많지 않았기 때문으로 조선시대 벽돌의 활용은 화성 축성을 전·후로 구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화성이 더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은 벽돌을 기존의 석조나 목조 구조와 결합해 새로운 조형을 창출한 점이다.

돌을 가지고 마치 액자를 만들 듯이 네모난 틀을 짜고 그 안에 벽돌로 벽면을 채우는 방식은 조선시대 화성에서 최초로 시도된 건축 디자인의 혁명이었다.

여기에 목조 구조와 벽돌벽의 결합이 시도됐는데 주춧돌 위에 둥근 나무 기둥을 세우고 기둥 사이에 벽돌을 쌓는 방식으로 건축미가 한 단계 진화를 거듭한 형태다. 이 같은 선조들의 뛰어난 건축 양식은 방화수류정에서 확인할 수 있다.

 

 

/홍성민기자 hsm@
<사진제공=수원화성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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