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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pe(Pontifex maximus)을 누가 한자로 敎皇(교황)으로 번역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시아 한자문화권에서는 오늘날까지 가톨릭 로마주교에 대한 호칭으로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단어는 ‘교회의 황제’라는 뜻이나 여기에서 교회란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로마가톨릭교회에 한정한다. 즉 로마가톨릭교회의 수장이라는 의미이다. 교황의 시작은 예수께서 12사도 중의 하나였던 제자 베드로에게 천국의 열쇠를 준 성서구절에 따라 전 세계 모든 교회의 시작이 베드로를 제1대 로마주교로부터 시작함을 천명한 것으로 부터이다. 현재 프란시스코 교황은 아르헨티나 출신의 266대 로마주교이며 교황이다.

교회사를 보면 교회(교황)와 국가(황제)의 권력투쟁의 역사는 길다. 필리핀의 마르코스가 대통령으로 독재 장기 집권했을 때 90% 이상 가톨릭 신자였던 필리핀 국민들은 대통령의 말을 무시하고 추기경의 말을 따랐던 적이 있다. 박해를 받아 지하무덤에서 숨어 예배드리던 초대교인들이 지상에 교회건물을 갖게 된 것은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덕이다.

그 후 기독교는 로마 황제에게 이에 대한 보답을 해야 했으며 이때부터 교회의 어용의 역사가 시작된다. 특히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당시 많은 학파들이 수 십 년 동안 수차례의 교리논쟁에도 불구하고 신조를 완성하지 못했으나 결국 로마황제의 신학적 입장을 반영하여 완성된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황제의 길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라야 하는 것이다. 국가의 지도자들이 불의하고 이들이 기득권자들의 편에 서서 약자들을 능욕한다면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 해야 한다. 교회와 목회자들이 물질주의와 확장주의의 유혹을 떨치지 못한 채 정의구현보다는 기복주의에 빠져들게 되면 그런 교회야 말로 구원받지 못한다.

최근 몇 대형교회 목회자들이 목사직을 세습하고 수천억을 들여 교회를 신축한 소식을 들을 때 시민들은 그런 교회와 목회자를 신임하고 존경할 턱이 없다. 거룩해야 할 교회가 주님께 영광을 드려야 할 교회가 세속적으로 타락하고 내부 분열을 일으키는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짓이다. 가톨릭교회라고 모두 건강한 것은 아니다. 사제들의 성추행문제부터 가톨릭이라는 거대 조직이 많은 내부 비리들을 숨기고 있을 것이라고 시민들은 추측한다.

이즈음 프란시스코 교황이 방한을 하여 몇 군데를 방문하신다. 광화문은 민주화의 공간적 상징이며 소통의 상징이다. 순교 터는 초대교회의 불굴의 신앙을 상징한다. 방문하는 사회복지 기관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상징일 수 있다. 세 곳의 서로 다른 장소는 교회가 지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 가시적 기구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교황의 본명(신명)이 프란체스코인 것은 청빈을 상징하기도 한다. 무 권위와 청빈과 영성은 성직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덕목인데 이 분은 적어도 이런 점에서 모든 목회자들의 귀감이 된다.

보수적인 개신교회는 가톨릭을 이단이라고 하고, 상대적으로 가톨릭교회도 개신교회를 교회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러한 교파싸움이 인류의 영성을 더 풍성히 하고 보람된 삶을 영위하는데 어떤 도움이 될까? 지방선거도 끝났고 여권이 압승하였다. 이것은 국민들이 단순히 진보를 싫어하고 보수를 지지한 결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정치이념논쟁에서 진보든 보수든 자승자박한 끈을 스스로 풀어 서로를 포용하고 자유하지 못한 채 모두 그 자리에서 권력투쟁만 하고 있다. 진정한 진보, 보수는 공공에 대한 불의나 개인, 특정집단의 욕심을 챙기려는 것이 아니라면 서로의 다름을 상호 인정하는 것이다. 정치, 신앙, 일상 삶의 관습 모두 그래야 한다. 다퉈서 얻어 챙길 수 있는 사사로운 것도 분명히 있겠지만, 공공을 위해 더 큰 것을 얻어 함께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것이다. 교황은 이를 위해 몸으로 솔선하고 있는 듯 보인다. 우리는 누구와 무엇을 위해 남을 비난하고 대립하는지 자성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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