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당시 지금의 시흥시 정왕동 옥구도에서 순국한 송운 원성모 장군의 후예 원장희(60) 전 시흥시의원은, 눈은 날카롭지만 대화를 나누다보면 이웃집 아저씨 같은 포근함이 묻어난다.
비교적 늦은 나이에 정치에 입문한 원장희 전 시의원은 13대조 할아버지 원성모 장군이 68세의 노익장을 과시하며 청나라 오랑캐에 맞서 싸우다 장렬한 전사를 했듯 지난 6대 시의회 의정활동도 열정이 넘치게 했다.
지난 6·4 지방선거에 나서지 못했지만 아직도 많은 주민들이 그의 열정적인 의정활동을 높이 평가하고 있어 원 전 시의원을 만나 그의 의정 경험담을 들어봤다.
-송운 원성모 장군은 어떤 분인가.
사료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1988년쯤 시화공단 조성을 위해 정왕산 일대를 토취장으로 편입하면서 장군의 묘소를 이장하게 됐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놀랐다. 370여년 전 시신이 미이라로 발견됐기 때문이다. 장군의 미이라는 수염과 관복까지 그대로 있었으며 관복에는 칼을 맞은 자국과 혈흔까지 그대로 남아있었다.
1636년 병자호란에 청나라 오랑캐는 지금의 시흥까지 진군했고, 장군은 의병을 모아 지금은 사라진 정왕산 봉수산성에서 적에 맞섰다.
봉수산성과 옥구도를 오가며 적과 전투를 벌이던 장군은 옥구도 전투에서 수많은 적을 섬멸하고 적의 화공(火功)에 장렬히 전사했다.
원 장군은 비록 사후였지만 영조 때 영의정에 추증됐다. 시흥시는 장군의 우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장군의 호를 따 정왕동 일부를 송운마을로 지정했다. 송운초등학교와 송운중학교도 장군의 호에서 유래됐다.
-정치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조상대대로 살아온 삶의 터전에는 공단 조성과 급격한 도시화로 인해 떠나는 고향 사람들이 많았다.
농사와 어업을 하던 이웃사촌은 헐값에 땅을 팔고 떠났지만 IMF를 전후해 수많은 외지인이 유입됐다. 이에 따라 청정지역에는 환경공해와 도시화에 따른 사회문제가 발생했다. 이를 우려하는 원주민들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었다.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못한 지역 주민을 위해 LPG가스통을 한두 번 배달해주다보니 어느덧 사업으로 발전됐다. 이후 가스충전소가 주택가까지 우후죽순 난립했다.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충전소들을 주택가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며 집단화시설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많은 난관이 있었지만 결국 전국 최초로 집단화단지를 오이도 측면에 조성해 20여개 업체를 입주시키는 등 시민의 안전을 우선했던 경험이 있다.
당시 조성한 가스집단화시설은 전국의 모범사례로 손꼽이고 있다. 내 자신의 이익보다는 사회에 헌신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풀뿌리 정치에 참여했다.
-경험을 토대로 기초의원의 역할은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50대 후반에 늦깎이 정치를 시작해 항상 초심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시의회에 입성하면서 곧바로 자치행정상임위원회 위원장직을 맡게 됐다.
이는 삶의 경험과 연륜을 고려한 동료 의원들의 배려라고 생각한다. 이후 상임위에서 복지와 다문화, 장애인, 주민자치에 역점을 두고 의정활동을 했다.
시정과 의정은 민심과 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소통의 답은 현장에 있다.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현장을 찾으면 모범답안이 대부분 나오게 된다고 생각한다.
4년 가까이 의정생활을 하면서 전문직인 공무원들을 이기려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과 이해하고 공감하도록 하는 수평적 보완관계를 유지했다.
주민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핑계로 공무원에게 압박하고 고함치는 행태는 바로 잡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현장에서 답을 찾고 해결방안을 찾기 위한 공부를 부지런하게 해야한다.
-의정활동을 하면서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제 가족 중 여동생이 소아장애를 앓아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다. 장애인들의 불편함과 남다른 시선 때문에 장애가족을 둔 가정은 소외된 또 하나의 사회이기도 하다.
이들을 향한 사회의 시선은 아직까지도 무시와 편견을 일삼는 경우가 종종 있어 이를 개선하기 위해 장애인 인권 조례를 만들고 싶었다.
차별받는 장애인들의 인권이 우리 사회에서 보장받지 못한 현실이 너무 안타까웠다. 우리 모두가 장애인을 가족으로 두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들에 대한 편견이 없어야 한다.
‘장애인 차별금지 및 인권보장에 관한 조례’를 제정하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장애인단체 관계자를 만나 조례에 대해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자 마음을 열고 직접 나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조례 제정 이후 시 집행부에서도 적극적으로 장애인들의 일자리 창출과 일자리 제공 등 장애인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시흥시신체장애인협회 등 많은 장애인단체에서 실질적 인권보장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에 감사의 전화를 받고 보람을 느꼈다.
-지역에서 가장 큰 현안은.
시흥시 다문화가정은 지난 1월 말 현재 4천987세대에 이르고 있다. 특히 내가 속한 지역구에는 타 지역보다 많은 다문화가정과 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시화공단이 인접하고 비교적 저렴한 임대료 때문에 외국인과 다문화가정이 밀집한 것이다. 외국인 근로자를 포함한 다문화가정의 가장 큰 애로사항은 언어소통이다. 여러 곳에 산재된 관련기관을 한 곳에 집중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게 할 필요가 있었다.
멀리 타향에서 이주한 다문화가족이 한국생활에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한국어 교육과 커뮤니티 등을 원스톱으로 할 수 있도록 예산 반영과 센터 설립 등 적극적인 지원을 했다.
다행히 지난해 다문화통합지원센터 부지를 확보, 다문화가정지원센터 등 관련 기구를 통합하게 됐다.
이처럼 원장희 전 시의원은 의정활동을 회고하며 공부하지 않는 의원은 주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공부하지 않고는 수십 년의 공직생활을 한 공무원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간혹 현실과 동떨어진 업무지침으로 주민과 갈등을 빚을 때는 해당 공무원에게 따끔한 지적을 하기도 했다. 예산 심의나 조례 제·개정을 할 때는 며칠 동안 밤을 새가며 공무원 수준의 정보와 지식을 습득하고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원 의원은 설명했다.
자치행정위원장 당시 그의 소통 리더십은 최고조에 달했다. 상충된 의견은 위원들이 책임감 있게 충분히 협의할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하고, 집행부와도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도록 뒷받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이번 지방선거에 나서지 못했다. 옹고집처럼 당보다는 주민에 다가섰던 그는 당원협의회가 실시한 미묘한 공천방식에 희생양이 된 것이다. 향후 행보에 대해 그는 “그동안의 의정경험을 토대로 간과했던 세밀한 부분을 찾고 있다”고 덧붙였다.
/시흥=김원규기자 kw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