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법을 수련할 때 가장 많이 생각하는 것이 검리(劍理)다. 조금은 어려운 말인 것 같지만, 칼을 사용하는 기본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검리에 옳지 않은 칼의 움직임이라면 무용지물이기에 무예로 이해하기보다는 오히려 체조에 걸맞는 동작으로 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 한번 올라간 칼은 다시 내려오는 것이 이치다. 그리고 한번 내려간 칼은 올라가는 것이 검법의 구조상으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칼은 혼자 움직이지 못한다. 자신의 손 그리고 온 몸을 이용하여 그 움직임을 표현하기에 그 몸 또한 이치에 맞아야 한다.
만약 한번 내려간 칼이 올라가지 않고 다시 내려가기 위해서는 몸을 뒤집어 칼을 원상태로 돌려놓아야 한다. 검법에서는 이를 번신(?身)이라고 해서 몸을 뒤집어 칼을 움직임을 자유롭게 만드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변수가 들어간다. 바로 나를 상대하는 사람의 칼이다.
자신의 칼이 아무리 검리에 옳다 하더라도 그 움직임이 상대의 칼에 막힌다면 그 또한 자유로울 수 없는 칼이다.
또한 상대가 나와 똑같은 길이의 칼이 아닌 좀 더 긴 칼이나 창을 잡았을 경우 대적하는 상대에 따라 그 움직임은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검리라는 것은 기본은 있지만 형식에 얽매여 있지 않고 상황에 따라 변화한다.
삶을 살아갈 때도 검리와 비슷한 도리(道理)가 있다. 이 또한 어려운 말이다. 인생을 살아갈 때 도의 이치에 따라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제 아무리 도를 깨우친다 하더라도 그것을 이치에 맞게 풀어내지 못한다면 그 또한 아무 쓸모없는 것이다.
그런데 검리와 도리에서 핵심은 그 ‘이치(理)’다. 옥편을 찾아보면 ‘이치’라는 뜻보다 먼저 나오는 것이 ‘옥을 간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한자다. 옥을 간다는 것은 결을 살리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형태로 빛나는 옥을 갈아내도 결대로 옥을 다듬어 내지 않으면 곧장 두 동강 나고 만다.
그 결이 이치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머리카락에는 머릿결이 있고, 잔잔히 비추이는 호수에도 물결이 있으며, 사람의 호흡에는 숨결이 있다. 만약 머릿결대로 빗질을 하지 않으면 머리카락은 엉켜 추한 모습을 만들 수밖에 없으며, 잔잔히 출렁이는 호수에 돌멩이를 던지면 원래의 잔잔한 물결은 순식간에 깨지고 작은 파동들이 그 위를 덮어 버리게 된다. 역시 숨결이 고르지 못하면 신체에 뭔가 이상한 조짐이 있다는 것이다. 그 결을 따르지 않으면 파국이 오는 것이다. 우리말에 ‘한결같다’라는 ‘결’도 바로 그것을 말한다.
이치의 중심에는 기본과 원칙이 있다. 제 아무리 위정자들이 ‘도(道)’를 외치고, 검술가들이 ‘검(劍)’을 수련한다 하더라도 그 중심에 있는 이치 즉, 기본과 원칙을 지키지 않는다면 요즘 개그프로에 등장하는 유행어처럼 ‘아무 의미 없다’가 된다.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인 관중(管仲)의 말을 모아 놓은 〈관자〉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도(道)가 가버린 자에게는 백성이 오지 않고(道往者其人莫來 도왕자기인막래), 도가 오는 자에게는 떠나는 백성이 없다(道來者其人莫往 도래자기인막왕)’라 하였다.
도라는 것은 단 한 번에 만들어지거나 스스로 행해지지도 않는다. 백성들의 삶 속에 어떤 기본과 원칙이 정책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꾸준히 풀어갈 때 비로소 도(道)는 발현된다. 오로지 이치에 맞는 기본과 원칙이 지속적으로 지켜질 때 비로소 사람들이 따르는 법이다.
또한 검 역시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칼을 잡고 상대와 나의 움직임을 생각하며 수천수만 번의 동일한 움직임을 반복해서 만들어야만 비로소 제 몸의 이치에 맞는 수련이 된다는 것이다.
오로지 단번에 힘과 권력으로 모든 것을 억누르며 세상의 도리에 따르지 않거나, 제멋대로 칼 가는대로 검리에 따르지 않는 수련은 종국에는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세상사 모든 것이 기본과 원칙 속에서 조화로움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도리(道理)고 검리(劍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