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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으로 풀어본 무예]나의 몸과 ‘通(통)’하라

 

무예는 자기 몸과의 ‘전투적 소통’이다. 적의 목숨을 취하는 일은 곧,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지극한 소통’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와 몸의 흐름이 일치될 때 비로소 본질적 가치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이유로 무예를 배우기에 앞서 가장 먼저 익히는 것이 신법(身法) 즉,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하고 그 한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심법(心法)과 안법(眼法)이라고 하여 평온한 마음 속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수련을 근본에 두고 있다. 자기 몸의 한계를 끌어 올리는 것이 수련이지만, 그 기준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수련을 진행하면 그 순간 몸은 부서지고 만다. 건강하기 위하여 혹은 누군가로부터 자신의 몸을 지키기 위하여 수련하는 무예가 오히려 자신의 몸에 무리가 되어 종국에는 독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몸과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것이 수련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는 비단 눈으로만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감(五感-눈 코 입 귀 몸)을 통해서 자신과 자신을 감싼 세상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오히려 눈으로만 그 형국을 이해한다면 5분의 1정도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된다. 오감의 기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보다 선명해지고 마음의 눈이 밝아진다. 이렇게 발전하면 오관(五觀)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觀)’은 말 그대로 지켜보는 것이며 깨닫는 과정의 일종이기도 하다. 불교나 유교, 도교 등의 종교에서는 말하는 ‘관(觀)’도 그러한 연장선에서 이해된다. 불교에서도 오관(五觀)을 이야기하는데, 부처님의 눈으로 세상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육안(肉眼), 천안(天眼), 혜안(慧眼), 법안(法眼), 불안(佛眼)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절에 가서 가장 많이 듣는 ‘관세음(觀世音)’이라는 말도 ‘세상의 돌아가는 내용을 귀로 보는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소리를 볼 수는 없으나 소리를 본다 함은 인간의 고뇌를 온 몸으로 이해하고 감싼다는 의미이다. 중생의 소리를 듣고자하는 부처님의 소중한 마음이 그 안에 담겨 있는 것이다.

역시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역경’-주역(周易)에서 등장하는 한 괘인 풍지관괘(風地觀卦)에서도 ‘관(觀)’이 등장하는데, 바람이 땅위에 불어 지나가듯이 이세상의 돌아가는 모든 현상을 육감으로 파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가 흔히 좋은 풍광을 둘러본다고 할 때 쓰는 말인 ‘관광(觀光)’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풍지관괘(風地觀卦)의 설명에서는 ‘관국지광(觀國之光) 이용빈우왕(利用賓于王)’이라고 하여 ‘나라의 빛을 바라봄이니, 손님으로서 왕대접을 받으면 이롭다’는 뜻을 담고 있다. 앞 문장인 관국지광(觀國之光)은 말 그대로 나라의 표정을 살피는 것인데, 그 나라에 살고 있는 백성과 그들의 삶과 연관 사회·자연적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들의 삶과 연관된 단 한 가지라도 어긋나면 그 빛은 퇴색되게 된다. 천둥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바람은 본시 아래서 위로 불어 올라가기에 아랫바람 즉 백성들의 삶이 어떠하냐에 따라 그 나라의 수준이 결정되는 것이다. 도교의 세상 보는 법인 ‘좌관(坐觀)’ 역시 그러한 마음을 담고 있다.

이렇게 뭔가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느끼기 위해서는 서로 통해야만 그 느낌이 선명해진다. ‘동의보감’에 이르기를 ‘통즉불통 불통즉통(通則不痛 不通則痛)’이라고 하여 ‘통(通)하면 아프지 않고, 아프면 통(通)하지 않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상하좌우가 제대로 통하지 않으면 분명히 문제가 생긴다. 사람의 몸도 하나의 유기체이기에 수련을 통하여 좀 더 스스로 통하도록 만들어 내는 것이 무예수련의 본질적 가치인 것이다. 이는 비단 사람의 몸 뿐만 아니라 세상살이도 마찬가지다. 서로 소통하지 않으면 어느 한 공간은 외면을 받거나 썩어가게 되어 있다. 머리가 모든 의사결정의 최고 위치에 있다고 해서 손발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의사결정을 하면 종국에는 파멸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머리는 진심으로 손발을 위하고 손발은 부지런하게 머리가 지시한 일을 수행하면 ‘관국지광(觀國之光)’은 더욱 빛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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