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달력
/권월자
성큼 내 앞에 섰다
마냥 기다려줄 것처럼 벽을 의지하더니
언약은 까마귀 귓등으로 흘리고
창밖을 보고 있다
다홍이 번져
하늘 한 켠이 수채화 되었다
겹겹이 덧칠한 잎새에도 가을이 묻었다
옆에 선 나무 꼭대기
까치와 친했던 홍시 서너 점 하늘을 맴돈다
포로록 파르르르 빙글 빙그르르 느린 자태
수줍게 내려앉는 갈잎
멈추며 바스락 가뿐하다
휘리릭 바람에 뭉텅이로 달려간다
또깍또깍 처벅처벅 시간 속으로
- 계간 ‘리토피아’ 겨울호에서
가을이 아름답다고 하면 그것은 아마도 황홀한 일몰의 아름다움과 같은 의미일 것이다. 생명이 소생하는 봄과 뜨거운 청춘의 여름이 지나면 어김없이 조락의 가을은 온다. 담금질된 인생이 서서히 식어가면서 동시에 연륜으로 얻어내는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는 것이 사실은 가을의 가장 아름다운 긍정적 수확이 아닐까 싶다. 다음은 혹독한 겨울이 기다리고 있고 뒤이어 새 봄은 반드시 올 것이지만 그 봄이 나의 봄일지 아닐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바람에 뭉텅이로 날리며 우리는 뚜벅뚜벅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가을달력 바라보던 일이 엊그제였으나 벌써 차가운 겨울이다. /장종권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