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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구의 世上萬事]뿌리깊은 대한민국의 완장(腕章)문화

 

작가 윤흥길의 대표적 소설 ‘완장’에는 저수지 감시원 종술이가 등장한다. 1980년대 초 전북 익산의 시골 농부 최씨는 땅 투기로 큰 돈을 벌어 떵떵거리며 관공서에까지 줄을 댈 수 있게 된다. 최씨는 저수지 사용권을 얻어 양어장을 만들고, 동네 건달인 임종술에게 관리를 맡긴다. 노란색 완장을 찬 종술은 무단으로 낚시질하던 도시에서 온 남녀들에게 기합을 주고, 한밤에 몰래 물고기를 잡던 친구와 그 아들에게 폭행을 가하기도 한다. 이 맛에 신이 난 종술은 읍내에 갈 때조차 완장을 두르고 활보하면서 완장의 힘과 권력을 실컷 만끽한다. 마침내 완장의 힘에 도취된 나머지 고용주 일행의 낚시까지 막으려다 결국 쫓겨난다.

그러나 해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종술은 여전히 완장을 놓지 못한다. 가뭄이 들어 저수지의 물을 빼야 하는데도 수리조합 직원들과 충돌하게 된다. 술집 작부 부월이는 “진정한 권력자는 완장을 차지 않는다”며 권력(?)은 허망한 것임을 일깨워주자 완장을 저수지에 내던지고 부월이와 함께 마을을 떠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난다. 나라 전체를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사건’을 보면서 불현듯 ‘완장’이라는 소설이 떠올랐다. 소설의 주인공처럼 완장을 차면 안하무인이 되는 것인가.

완장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자격이나 지위 등을 나타내기 위해 천이나 비닐로 만들어 팔에 두르는 띠’라 돼있다. 그런데 이 물건을 차면 왠지 모르게 위에서 군림하고 싶은 충동이 생긴다. 군사문화가 판을 치던 70년대 학교 다닐 때도 완장의 위세는 대단했다. 등교 시 교문에는 학생주임과 함께 ‘선도부’ ‘기율부’란 완장을 두른 학생들이 서 있어 왠지 모르는 위압감을 주었다. ‘주번’ 완장이라도 차면 그것 역시 알량한 권력이었다. 군에서는 교관, 당직사관이라는 완장도 있고, 공사장에는 현장감독이라는 완장도 있다.

완장은 이처럼 힘을 상징하게 마련이다. 때로는 권력의 하수인들이 호가호위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역사를 보면 더 그렇다. 6·25전쟁 때 붉은 완장이나 5·16 쿠데타 때 혁명군의 완장 등이 그것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면서 국정을 농단하는 완장 찬 권력실세들의 거드름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비선 실세’라 지칭되는 권력의 완장들은 비단 청와대에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각, 국회, 지자체 등 공무원 조직과 사회 곳곳에 최소 서너명씩 몰려앉아 국정이나 조직을 제멋대로 주무르고 있다. 마치 이문열의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엄석대와 한병태가 야합하여 누리다가 단숨에 몰락한 권력(?)처럼. 박정희시대는 물론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 모두가 그랬다.

나라의 시계(時計)를 멈춰서게 한 작금의 정국도 우리 역사에 뿌리깊게 내린 완장문화의 산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진진박(진짜 진실한 친박), 특박(특명받은 친박)에다 감별박(누가 진박인지를 가려내는 감별사 진박)까지 떠들어대며 공천권을 휘두르고, 완장 빼앗기 경쟁을 벌인 친박들도 몰락해간다. 어느새 이들은 숨을 죽이고 있다. 완장 대신 포승줄을 차게 된 비선실세들 중 일부는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하다.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것은 국민보다 완장들을 의지한 대통령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대통령에게 충고하지 못하고 달콤한 권력과 자리찾기에만 골몰했던 이들의 책임도 크다. 완장들에게 불나방처럼 모여들어 줄을 대던 기업이나 고관대작들도 마찬가지다. 권불십년 화무십일홍(權不十年 花無十日紅)의 진리를 아직도 깨닫지 못했음일까.

박 대통령은 정윤회의 청와대 문건이 터졌을 때 “청와대의 진짜 실세는 진돗개”라고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진돗개는 역시 최순실과 그 일가들이었다는 사실이 검찰 수사과정에서 속속 드러나고 있다. 스스로 완장을 찼든, 대통령이 채워줬든 그 뒤에 숨어 호가호위하던 이들은 이제 그 완장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러려고 대통령했나”라며 결국 완장의 인질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대통령도 이제 깨달았겠지만 때는 이미 늦은 듯하다. “이러려고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나”는 탄식의 소리를 들으면 더 그렇다. “진정한 권력자는 완장을 차지 않는다. 권력은 허망한 것이다.” 술집 작부 부월이가 이 시대의 권력자와 ‘완장’들에게 던진 경고의 메시지가 아직도 가슴 깊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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