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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윤희의 미술이야기]폴 고갱의 유작

 

고갱의 유작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1897)’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 광활한 우주가 품고 있는 진리를 마주하는 듯한 경외감을 갖게 된다. 폭이 4m 가까이 되는 이 작품은 어마어마한 사이즈, 심상치 않은 제목과 더불어 관객들에게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먼 나라의 원시적인 문화와 신화를 압도적으로 전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철썩같이 믿어왔던 상식과 종교의 중심을 살짝 기울게도 할 수 있을 만큼, 놀라운 위용을 지닌 지렛대와도 같이 느껴진다.

고갱은 한 지인에게 쓴 편지를 통해 이 작품이 혼신을 다해 완성한 유작임을 밝혔다. 생애 마지막으로 타히티 섬에 머물고 있었던 고갱은 몹시 외로웠고 병들었지만, 마지막 영혼을 불태우며 이 작품에 임했다. 그러니 그간 쌓아왔던 모든 테크닉과 열정, 섬에서 보낸 오랜 시간들이 이 작품에 모두 녹아들어갔을 것이다.

고갱이 작품에 담고자 한 그 신비가 무엇이었는지, 그가 탐구한 ‘원시’란 무엇이었는지는 그의 에세이 ‘노아 노아 (Noa Nos)’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이 책에는 그가 섬에 지내면서 주워들은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에피소드 못지않게 흥미진진하고 역동적인 신화들이 소개되어 있으며, 신과 인간들이 자아내는 그 역동성에 필적하는 물질과 영혼의 움직임, 그 과정에서 촉발되는 진화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담겨있다.

물론 이 책에는 보다 재미있는 다른 대목이 담겨있다. 바로 섬에서 맞이한 어린 신부 데후라에 관한 것이다. 여행 중 들른 한 원주민의 집에서 그는 그녀를 처음 만났다. 고갱을 초대한 안주인이 무슨 일로 여행을 다니느냐고 묻자 고갱은 “아내를 구하러 다니고 있다”고 대답했고, 그 말을 들은 안주인은 대뜸 열세 살 먹은 자신의 딸을 아내삼지 않겠느냐고 권한다. 고갱은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고갱은 첫눈에 그녀가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했고, 곧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중년의 나이에 십대의 부인을 맞이하다니 정말 철면피 고갱이다.

어쨌거나 두 사람의 결혼생활은 행복했다. 두 사람은 작은 오두막에서 사랑을 나누고 많은 이야기도 나누었다. 데후라는 고갱에게 섬에서 전해오는 오랜 신화를 들려주었고, 고갱은 그녀에게 과학적 원리를 알려주었다. 그녀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그 신비롭고 아름다운 이야기들과 행복했던 시간들이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에도 녹아들어가 있다. 하지만 여성 편력이 대단했던 고갱은 결국 그녀에게도 나쁜 남자가 되어버렸다. 들고 온 돈이 다 떨어졌기도 했고, 섬에서 완성한 작품들을 파리에 소개해야 했기에 섬을 떠나버린 것이었다. 그를 태운 배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데후라는 참 많이 울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갱은 자신이 이 섬을 처음 왔을 때보다 야만인이 되어서, 더 현명해져서, 그리고 한 이십년쯤 젊어져서 나간다고 외친다.

애석하게도 파리의 반응은 냉담했고 그는 더 가난해졌다. 파리 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다시 섬으로 돌아왔지만 데후라는 다른 남자와 재혼한 뒤였다. 새로운 오두막을 얻었고 새로운 동거인도 만났지만 그의 기력은 쇠하여만 갔다.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는 작가의 인생이 저물어갈 무렵 절망 속에서 완성해나간 작품이었다.

이 작품에 담겨있는 신비란 어쩌면 먼 이국땅에 전해져 내려오는 낯선 종교이기보다는, 작가가 일생에 거쳐 보내온 시간 그 자체인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작품의 오른쪽에 위치한 숙덕거리는 두 여인의 모습도, 화면 왼쪽에 위치한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여인의 모습도 이미 그 전의 작품들을 통해 우리는 만나왔었다. 오랜 작업의 결과들이 이 작품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전무후무한 독창성을 이룩한 고갱이었지만 그도 한 땀 한 땀 노력과 시간을 들여 작품을 완성하는 한 인간에 불과했다. 허나 그 이음새에서 어떤 신비로운 힘이 흘러나와 작가의 온 인생과 작품을 초월해버리곤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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