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2 (목)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끝나지 않은 정조의 건축]옹성 위 적루(下)

 

성문은 취약지역이기에 보통은 누각(적루)를 두어 전방감시와 방어를 하게 된다. 옹성에 문을 둘 경우도 방어력을 높이기 위해 적루를 설치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수원화성의 남·북옹성문 위에도 적루를 설치하고자 하였으나 결국 설치하지 않았다. 의궤에서는 이유를 ‘본성이 옹성의 가로로 있어 설치하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성이 가로로 되어 있지 않은 성곽은 없는데 이를 이유로 적루를 설치하지 않은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적루를 설치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바로 새로 만든 옹성의 성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이 시설은 새로운 재료와 시설들이 겸비된 최강의 옹성이었다. 기존 성곽의 재료는 화공(火攻)에 약한 돌로 되어있으나 신 옹성은 불에 강한 벽돌로 만들어졌고 옹성문(甕城門)에 홍예(虹霓)와 오성지(五星池)라는 새로운 방어시설이 설치되었다. 당시 대표 옹성은 서울 흥인지문으로 재료는 돌이었으며 옹성문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비교해 화성의 옹성은 몇 단계나 앞서는 최첨단 시설로 자부심이 넘치게 했다. 그래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활자로 만든 화성성역의궤를 펴내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첨단의 옹성에 대해 자부심이 넘치고 이로 인해 적루를 세우지 않게 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의궤에서는 비합리적인 의견을 제시하였는데 그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옹성을 계획할 때 적루가 없어도 될 정도의 방어 수준이 높았다. 하지만, 을묘년 행사 이후의 2차 공사에 있던 북옹성 공사를 혜경궁의 방문에 맞추기 위해 1차 공사로 변경한다. 겨울에 그것도 급하게 만들어져 원하는 수준의 방어력이 나오지 못했다. 그렇다고 계획에 없던 적루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고 본다. 옹성의 방어력이 낮아진 것이 바로 정조의 명령으로 진행된 것인데 원인을 국왕에게 돌리는 것 자체가 불충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루를 생략하는 이유를 뛰어난 성능의 옹성 아닌 다른 이유를 붙이게 되었다고 본다.

북옹성은 혜경궁의 방문 이전에 만들어진 순수한 벽돌 시설로 화성 최초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겉으로는 뛰어난 방어시설들이 첨가된 첨단시설이었다. 북옹성의 문제점이 무엇이기에 노출되지 않고 있다가 옹성이 준공된 지 30년이 지나 문제점 해결을 위해 적루를 설치하게 되었나?

문제는 옹성 본체는 화공에 강한 벽돌로 되어 있으나 옹성문 홍예는 돌로 되어 벽돌 옹성의 의미를 상쇄시켰다. 옹성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이 옹성문인데 이곳의 홍예를 돌로 만든 것이다. 전쟁 시 적이 옹성문 앞에 풀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놓으면 위에 있는 홍예석은 바로 무너져 내릴 것이다. 막대한 비용을 들여 옹성을 벽돌로 쌓았는데, 가장 취약한 홍예를 돌로 만든 것이다.

벽돌 옹성에서 가장 중요한 옹성문의 홍예를 벽돌이 아닌 돌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당시 공사감독관의 마음을 들여다보자.

북옹성 공사는 음력 10월 26일에 시작하였으니 12월이 될 것이다. 당시 벽돌 공사는 제작과 시공능력이 부족한 상태이고 강회를 사용하여 벽돌을 쌓아야 하는데 물이 얼어 공사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북옹성에서 가장 어려운 공정이 홍예 부분이었는데 당시 공사관계자들은 순수벽돌로만 홍예를 완성할 자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홍예벽돌 밑에 홍예석을 추가한 2중 홍예가 만들어져 새로운 ‘석전혼합홍예(石塼混合虹霓)’가 탄생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결과물은 벽돌성의 장점이 다 없어지고 석성(石城)의 수준으로 되돌리게 된다.

남옹성은 을묘년 행차 이후에 공사가 일어난 북옹성과 달리 충분한 시간이 있고 벽돌 시공에 자신감이 붙어 홍예석이 뺀 순수 홍예벽돌(虹霓?)로 만들게 된다. 정조 사후에 이런 문제가 노출되고 북옹성 홍예의 방어력을 보충하기 위해 적루를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남·북옹성이 같은 모양으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남옹성에도 적루를 설치하게 되었다고 본다.

 









COVER 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