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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제3의 고향

 

남북이산가족 상봉이 있었다. 가족 상봉이 이루어진 금강산호텔은 눈물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이금섬(92) 할머니는 상봉장에 도착해 아들 리상철(71)씨의 자리에 오자마자 아들을 끌어안고 눈물을 쏟았다. 이렇게 수십 년을 잊지 못하고 기다려 만난 사람들도 있지만 끝내 만나지 못하고 아픔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도 있다.

‘1년만, 아니 여덟 달만 빨랐더라면…’

87세 김진수 할아버지는 끝내 여동생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슬픈 소식을 들어야했다. 상봉 신청자 절반 이상이 이미 사망했고 생존자 85% 이상이 70대 이상의 고령이다. 이제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남북 협력을 통해 정례화가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산가족 상봉 때면 나도 마음이 울컥할 때가 많다. 돌아가신 우리 시아버님도 고향을 북에 두고 홀로 월남하신 실향민이다. 가끔 며느리인 나에게 고향과 부모님에 관해 말씀을 하셨다.

몇 해를 그렇게 지나시다 어느 날엔가 새벽에 티브이 소리가 커서 들여다보니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뉴스를 접하시고 망연하게 앉아 계셨다. 아무 말씀도 못하시는 얼굴을 적시는 눈물이 브라운관에서 나오는 빛에 빛나고 있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아버님께서는 눈에 띄게 힘을 잃으셨다.

며칠 뒤 저녁을 짓고 있는데 부엌으로 나오시더니 계란 있으면 프라이 하나 해 달라고 하셨다. 얼른 준비해 드렸더니 어느새 소주를 커다란 물 컵에 가득 따라 드셨다. 바라보는 내 목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이젠 고향집 가는 길도 가물가물 하고, 어머니 아버지 얼굴도 잘 떠오르지 않는다. 벌써 몇 해를 꿈에도 안 오시는 걸 보면 아마 세상 뜨신 것 같다.”

나는 무어라고 대답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난 말이다. 이제 고향 가는 거 영영 그만이다 하고 살았는데, 니가 들어와 저놈(손자) 낳고 크는 걸 보면서 세상 부러울 게 없었다. 나 같은 따라지한테 저렇게 이쁜 놈이 생길 줄 꿈에라도 상상이나 해봤겠니…. 나중에 꼭 저놈 앞세우고 고향에 가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아버님께서는 그렇게 끔찍이 위하던 손자와 고향에 가고 싶은 꿈과 한스러운 세월을 묻고 그 이듬해 눈을 감으셨다. 그리고 내게 숙제를 남기셨고 아직 가지 못했지만 언젠가 아들과 함께 가야하는 제3의 고향이 생겼다. 이다음에 시절 좋아지면 나대신 꼭 찾아보라고 하신 숙제로 알려주신 평안남도 진남포시 하비석리가 아버님 고향 주소다.

며칠만 피해 있다 잠잠하면 돌아오라는 말씀이 마지막이 될 줄 짐작이나 했을까? 이산가족상봉 소식을 들으면 그 때 아버님 말씀 듣지 말고 내가 상봉 신청할 걸 그랬다는 후회가 들기도 하지만 그것도 이젠 다 소용없는 일이 되었다.

어떤 땐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지금쯤 만나고 계시지요? 하고 혼자 묻기도 한다. 바로 오늘 같은 날이다. 아버님 손주 이제 어른 다 됐어요. 대학교도 한 번에 철컥 붙고 군대도 갔다 와서 취직해서 회사도 잘 다니고 할머니 용돈도 드려요. 저도 제3의 고향 주소 잊지 않고 있어요.

여지없이 짭짤한 액체가 입꼬리를 타고 흘러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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