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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에세이]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10월이 가기 전인 28일에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는 충의사(忠義祠)인 윤봉길의사기념관을 찾아보았다.

지난해 중국의 ‘홍구(만국)공원’을 찾았을 때 이름이 ‘노신공원’으로 바뀐 것을 보고 좀 서운했지만 그래도 윤봉길 의사의 넋이 살아있다는 생각에 위로를 받고 귀국길에 올랐다.

마음속으로 늘 윤봉길기념관을 찾아봐야지 하다가 거의 1년이 다 되어 찾았다. 낙엽이 지는 가을이어서 마음이 쓸쓸한 것보다는 독도문제나 위안부 문제 등 일본과의 풀리지 않는 문제들이 생각나서 더욱 쓸쓸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시는 나라를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

일본의 한국 통치는 잔학했다. 독립군의 목을 잘라서 그 목을 들고 웃으며 기념사진을 찍거나 작두로 목을 자르는 장면들을 보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다시는 나라를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과연 오늘 우리의 안보는 걱정을 않해도 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에 일본 국가 기미가요가 울려 퍼지는 순간, 윤봉길 의사는 단상으로 접근해 물통폭탄을 투척하였다. 이 사건으로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와 상하이 일본거류민단장 가와바타 사다지가 죽었다. 중화민국 공사 시게미쓰 마모루는 오른쪽 다리를 잃었고 우에다 중장은 왼쪽 다리를 잃었다. 또 노무라 중장은 오른쪽 눈을 잃었다. 이 외에도 많은 주요 인사들이 부상을 당했다.

당시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 했지만 즉석에서 일본 헌병에게 붙잡혔으며 동시에 마구 구타를 당하여 피투성이가 되었다.



당당하게 연행되어 가는 모습에서 애국심 느껴져

조금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보면 윤봉길 의사의 애국심을 느끼게 된다. 일본군 사령부로 끌려갔다가 조사를 받은 후 같은 해인 5월 28일 상해파견 일본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같은 해 11월 18일 오사카로 후송되어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약 한달 후인 1932년 12월 19일에 가나자와 육군형무소(金澤陸軍刑務所)에서 7시 27분 사형 집행을 당했다.

필자는 기념관 앞에서 김구 선생님과 서로의 손목시계를 바꾸어 차고 양손에 폭탄을 든 채 결의에 찬 윤봉길 의사의 눈동자를 생각했다. 또 양팔이 하얀 천으로 각각 두 곳이 묶여있고 이마에 총탄 자국이 뚜렷한 총살당한 그 모습을 생각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윤봉길 의사가 남긴 여러 가지 말 중에서 필자의 가슴을 가장 울렸던 것은 유서에서 자식들에게 남긴 다음의 두 마디였다. 첫째, 애비가 없다고 해서 조금도 서러워하지 말라. 둘째, 너희들은 피와 뼈가 있다면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말라.

병역을 회피하기 위해서 각종 술수를 쓰는 일부 젊은이들, 어느 정부시절에는 일반인들보다 장·차관이나 국회의원들이 병역미필의 %가 높았던 것, 왜 군대도 못갈 정도의 약한 사람들이 높은 고관대작이 될까? 생각했었다.

지금 이 나라에 윤봉길 의사처럼 조국을 위하여 목숨을 버릴 국민들은 얼마나 될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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